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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딜락 (Cadillac)

moyamoya_toki 2017. 2. 28. 00:16

캐딜락은 전세계 자동차 생산량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제너럴 모터스 사가 가지고 있는 브랜드 중 최고급 브랜드이다. 세계의 3대 고급 승용차를 말하라면 영국의 롤스로이스, 독일의 메르세데스 벤츠, 그리고 미국 제너럴 모터스의 캐딜락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가의전 행사 때 캐딜락 프리트우드 75 세단을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부터 캐딜락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캐딜락이란 브랜드는 미국 미시간 주의 디트로이트에서 시작되었다. 1902년, 헨리 릴런드가 파산 위기의 '디트로이트 자동차 회사'를 인수해서 캐딜락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다. 캐딜락이란 브랜드명은 미국 디트로이트 시를 개척했던 프랑스 탐험가 '르쉬외르 앙투안 드라 모스 캐딜락'경의 이름을 딴 것이다. 캐딜락은 브랜드명에서 그치지 않고, 로고 또한 캐딜락 가문의 문장을 사용하고 있다. 설립자 헨리 릴런드는 본래 미국 벨몬트 출신이었다. 그는 미국 남북전쟁 이후, 디트로이트에 자리를 잡고 기계공장을 차렸다. 그 후 그는 자동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 파산 위기에 직면했던 디트로이트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게 된다. 헨리 릴런드는 이후 1903년에 뉴욕 오토 쇼에 4인승 차량을 출품했다. 그가 출품했던 '모델 A'는 우수한 성능과 부품 호환성, 1기통 10마력의 엔진 등으로 미국 상류층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캐딜락은 그 후 4년 만에 세계 최초로 250개의 자동차 부품을 표준화한 모델 S를 출시했다. 이 제품은 표준화된 부품 덕분에 부품 호환이 가능했고, 이러한 장점 덕분에 큰 인기를 얻었다. 모델 S는 1908년, 자동차의 노벨상인 '드와 트로피'를 수상하기도 한다. 

이런 성과를 거둔 캐딜락 자동차 회사는 1909년, 제너럴 모터스에 매각된다. 제너럴 모터스는 캐딜락을 북아메리카 자동차 산업에서 대표적인 브랜드로 성장시킨다. 1910년, 캐딜락은 지붕과 창문이 일체형인 구조의 차를 처음 출시했다. 이 때 부터 캐딜락 자동차의 유선형 바디 디자인이 시작되었다. 1902년에는 세계 최초로 전기식 시동장치를 장착한 모델 30을 출시했다. 이 차 또한 신기술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캐딜락의 역사상 두번째 드와 트로피를 수상했다. 그 후 1914년, 캐딜락은 세계 최초로 70마력 엔진을 개발했다. 이 엔진의 이름은 V8엔진으로 1915년 이후 상용화되었다. 캐딜락은 이후 캐딜락이 개발하는 모든 차량에 V8엔진을 장착하고 대량생산 체제로 전환하게 된다. 하지만 제 1차 세계대전이 1914년 발발하게 되었고, 캐딜락 또한 전시물품을 생산해야 했다. 그 때까지 캐딜락과 함께 했던 헨리 릴런드는 비행기 엔진 개발을 위해 제너럴 모터스를 떠나게 되었다. 

제너럴 모터스는 헨리 릴런드가 떠난 후, 캐딜락 브랜드를 고급차 브랜드 라인으로 재정비했다. 제너럴 모터스는 '고급차'라는 인식을 위해 디자이너를 영입했다. 디자이너 할리 얼은 평준화된 자동차 기술 속에서 캐딜락을 돋보이는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인재였다. 그는 1927년, 세계 최초로 안전유리와 철제로 구성된 Turret Top을 장착한 자동차 디자인을 공개했다. 그의 디자인은 1940년대에 개발된 제너럴 모터스의 뷰익과 캐딜락에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국의 대공황은 1930년대에 들어 절정을 달렸다. 이 때문에 상류층을 타겟으로 마케팅했던 캐딜락의 판매실적은 악화되었다. 그 당시 캐딜락의 차량은 부유한 백인층에게만 판매했었다. 하지만 남북전쟁 이후 노에에서 해방된 흑인들이 돈을 모으면서 부유한 흑인들이 많이 생겨났고, 캐딜락은 그들을 새로운 고객층으로 영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영업전략을 펼친 후, 캐딜락의 판매율은 그 전에 비해 70%이상 상승하게 되었다. 이 때, 마케팅 아이디어를 제시했던 캐딜락 서비스 매니저 니콜라스 드레이스타트는 1936년, 공로를 인정받아 캐딜락을 이끌게 된다. 

니콜라스 드레이스타트는 흑인 부유층 마케팅 만으로는 변화하는 자동차 시장에 적응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캐딜락은 1936년, 처음으로 중간 가격대의 자동차인 시리즈 60을 출시했다. 할리 얼의 독특한 디자인은 소비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시리즈 60의 후속 모델이었던 1세대 60 스페셜은 미국 시장에서 큰 인기를 누렸고, 이후 11세대까지 디자인이 업그레이드 되었다. 그 중, 1948년에 출시되었던 3세대 60 스페셜부터 캐딜락의 상징이 된 '테일핀'디자인이 적용되었다. 이 또한 할리 얼이 디자인했으며 자동차 후면에 꼬리 날개를 장착한 특이한 디자인이었다. 

캐딜락은 1953년, 캐딜락 브랜드 50주년을 맞이하여 최고급 모델인 '캐딜락 엘도라도'를 출시했다. 최첨단 장비들이 장착된 캐딜락 엘도라도는 미국 부유층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그들은 캐딜락이 부의 상징이라고 여겼고, 엄청난 고가인 캐딜락 엘도라도는 그 중에서도 부를 나타낼 수 있는 최상의 제품이라 생각했다. 캐딜락 엘도라도는 그 인기에 힘입어 미국의 34대 대통령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취임식에도 사용되었다. 캐딜락은 비싼 차를 만들어도 많이 판매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에 1957년, 캐딜락은 최고가 제품인 '엘도라도 브로엄'을 출시했다. 이 차는 당시 가격으로 1만 3천달러가 넘는 제품이었고, 심지어 수공 생산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최첨단 기술과 디자인이 접목된 제품이었지만 워낙에 고가다보니 수요가 많지 않았고, 엘도라도 브로엄은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2년 뒤 출시된 1959년형 엘도라도는 캐딜락 엘도라도 모델 중 가장 인기가 좋았다. 최대 출력 345마력에 최고 시속이 195km에 달했던 이 모델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선물했던 일화가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심지어 이 차량은 영화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헐리우드 영화 '핑크 캐딜락'에 등장한 1959년형 엘도라도는 핑크캔디라는 애칭이 붙을 정도였다. 같은 해에 캐딜락은 드빌 시리즈도 출시했다. 6.4L 가솔린 엔진을 장착했던 캐딜락 드빌은 최대 325마력을 낼 수 있었고, 디자인도 독특해 큰 인기를 얻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 오일쇼크가 발생했다. 많은 자동차 회사들이 미국 정부의 규제에 맞춰 에너지 효율이 높은 차량을 잇따라 생산했다. 캐딜락 또한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 위해 그동안 출시했던 묵직하고 큰 자동차 대신 슬림한 자동차를 개발했다. 스빌 시리즈는 4도어 세단이었는데 작으면서도 고급스러운 디자인에 디젤 엔진과 LED 디스플레이를 적용했다.  그 뿐 아니라 캐딜락은 1979년, 구찌와의 콜라보레이션을 기획했다. 구찌의 디자인이 차량 내부에 접목된 스빌 구찌 에디션은 고급스러우면서도 에너지 효율이 높다는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1980년대의 캐딜락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가변식 디젤엔진을 적용한 2세대 스빌을 출시했으나 잦은 고장 등으로 엔진을 믿을 수 없다는 이미지만 얻게 되었다. 1992년 캐딜락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캐딜락 스빌 투어링 세단은 캐딜락의 첫 번째 스포츠형 세단이었다. 도로상황에 맞춰 주행을 조절하는 온스타 시스템과 자동충돌 알림기능 등의 첨단 기술들이 접목되었고, 그 해 새로 개발된 노스스타 엔진까지 장착된 차량이었다. 캐딜락 스빌 투어링 세단은 출시된 1992년에 모터트렌드가 선정한 올해의 차에 뽑히는 영광을 누렸다. 그 후 캐딜락은 꾸준히 고급형 고성능 세단들을 출시했고, 아직까지도 세계 3대 고급차 브랜드로 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