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하는 가방은 무엇일까? 한 설문조사에서 1위를 한 가방이 바로 에르메스의 버킨 백이라고 한다. 천만원을 호가하는 이 백이 여성들의 로망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심지어 엄청난 가격에도 불구하고 예약을 하지 않으면 구입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니, 에르메스에 대한 궁금증은 더해져만 간다. 지금부터 에르메스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면서 에르메스가 전 세계 여성들의 로망이 된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에르메스는 1837년 티에리 에르메스가 프랑스 파리에서 오픈한 작은 마구용품 가게로 시작하였다. 피혁공이었던 티에리 에르메스는 1800년대에 주요 교통수단으로 사용되던 마차에 필요한 여러 물품들을 직접 만들어 판매했는데, 그의 기술은 매우 뛰어났다. 그는 1867년 만국박람회에 자신이 만든 마구 제품을 출품해서 최고상을 수상했다. 덕분에 티에리 에르메스는 부유층 고객들을 자신의 고객들로 끌어모을 수 있었다. 티에리 에르메스에게는 샤를 에밀 에르메스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티에리 에르메스가 사망한 해인 1878년에 만국박람회에서 또 한 번 최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샤를 에밀 에르메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업을 물려받았고, 1880년에 매장을 프랑스 엘리제궁 근처로 이동했다. 엘리제궁 근처 포부르 생토노레 24번가는 부유층 고객들이 드나들기 쉬운 장소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에르메스 브랜드는 고급화 전략을 취하게 되었다. 에르메스에서 만드는 수작업 제품들은 하나같이 질이 좋았기 때문에 평판도 좋은 편이었다.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 외에도 일본의 군주들까지 에르메스의 제품을 사용했다. 에르메스는 시대가 바뀌면서 마차에서 철도로 교통수단이 변화하자, 마구용품 대신 여행용품이나 생활용품 쪽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샤를 에밀 에르메스의 두 아들인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와 아돌프 에르메스가 1902년에 사업에 참여했다. 이 중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가 사업을 이어받으면서, 에르메스 사는 본격적으로 패션 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에밀 모리스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 파견을 나갔는데, 그 때 유럽에는 전해지지 않았던 지퍼 장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에밀 모리스는 프랑스로 돌아와 '지퍼'에 대한 전매권을 획득해, 다양한 제품에 활용했다. 이 때, 처음 나온 제품이 바로 '볼리드' 였다.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첫 지퍼 잠금 가방이었다. 에밀 모리스는 미국에서 가방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돌아와, 가죽을 이용한 다양한 제품을 선보였다. 1922년 세계 최초로 가죽 핸드백을 만든 곳도 바로 에르메스였다. 이 외에도 실크스카프나 벨트, 장신구, 향수 등 다양한 패션제품을 생산해 인기를 끌었다. 에르메스는 마구상으로 시작한 브랜드이기 때문에, 마구를 만드는데 필요한 다양한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에밀 모리스는 이 기술들을 핸드백이나 여행가방을 만드는데도 활용해서 더욱 고급스럽고 튼튼한 제품을 생산했다. 1929년에는 에르메스의 첫 여성복 라인이 출시되었다. 1930년대 대공황이 일어나면서, 전 세계의 경제성장이 주춤했다. 이 시기에 에르메스는 단순하면서도 사용 용도가 분명한, 오랫동안 사용이 가능한 튼튼한 제품들을 선보였다. 현재 에르메스의 대표 상품이 된 캘리백, 브리프케이스, 기자용가방, 승마복 등은 전부 이 시기에 만들어진 제품이었다. 캘리백은 처음부터 캘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1935년에 첫 출시되었던 가죽 핸드백을 모나코의 왕비인 그레이스 캘리가 임신한 배를 가리기 위해 사용한 것이 잡지에 실리면서 '캘리백(Kelly bag)'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제품은 현재까지 에르메스의 대표 상품으로 활약하고 있다. 에밀 모리스는 1945년에 현재까지 에르메스의 로고로 사용되고 있는 사륜마차 로고(깔레쉬)를 상표로 등록했다. 


에밀 모리스의 사위인 로베르 뒤마가 사업을 물려받고, 에르메스의 성장세는 잠시 주춤한다. 현재 에르메스의 상징이기도 한 오렌지색 포장박스나 에르메스의 첫 향수인 '오드 에르메스' 등이 모두 이 시기에 나왔다. 하지만 다른 경쟁기업들이 워낙 빠른 성장세를 보이던 때라, 에르메스는 상대적으로 성장세가 둔화된 모습이었다. 이런 에르메스를 바꾼 것은 티에리 에르메스의 5대손인 장 루이 뒤마 에르메스였다. 그는 1978년에 대표자리에 오른 후, 시계부문 자회사인 라 몽트르 에르메스를 스위스에 설립하고, 에르메스의 실크, 가죽, 기성복 라인을 발전시켰다. 또한 팔찌, 자기, 크리스탈 등 제품을 확대하여 에르메스의 제 2의 전성기를 불러왔다. 장 루이 뒤마 회장은 이후 패션디자이너와의 교류를 통해 에르메스의 전통에 현대적 감각을 추가하고자 했다. 그는 베로니크 니샤니안이나 마틴 마르지엘라, 피에르 하디, 장 폴 고티에 등의 디자이너를 영입해서 남성복, 여성복, 주얼리 라인 등을 재정비했다. 이 중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tier)는 에르메스의 수석 디자이너로 8년간 활약하며 에르메스를 크게 성장시켰다. 장 루이 뒤마 회장은 2006년에 사임하고, 그 뒤를 이어 에르메스 사의 첫 번째 전문 경영인인 파트릭 도마(Patrick Thomas)가 CEO로 임명되었다. 2011년에는 새로운 수석디자이너로 크리스토프 르메르(Christophe Lemaire)가 선임되었다. 2014년 3월에 악셀 뒤마 에르메스가 새로운 CEO가 되면서, 에르메스 사는 다시 오너 체제로 변경되었다.


에르메스는 전통의 가죽제품 외에 맞춤복, 기성복, 악세서리, 향수, 문구류, 자기류, 은식기류 등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상품으로는 단연 '캘리백'과 '버킨백'이 있다. 버킨백은 장 루이 뒤마 회장이 영국 출신 모델인 제인 버킨과 비행기에 동석하면서 만들어졌다. 제인 버킨의 가방 안의 물건들이 엉망으로 뒤섞여있는 것을 본 장 루이 뒤마 에르메스는 수납이 가능한 포켓이 가방 안에 부착된 가방을 만들어 주었는데, 이것이 '버킨백'이 되었다. 버킨백은 일주일에 2개 정도만 만들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희소가치가 있는 제품이다.


에르메스는 광고에는 많은 돈을 투자하지 않는다. 제품의 질만으로 승부하자는 에르메스 가의 오랜 철학 덕분에, 에르메스는 광고 대신 전시회 등 문화행사에 더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다. 에르메스는 2008년에 순수문화를 지원하기 위한 에르메스 재단을 설립해서 운영하고 있다. 에르메스 재단은 3년에 한 번 씩 에밀 에르메스 상을 주최하고 있는데, 신진 디자이너들이 응용 미술과 디자인 부문 쪽에서 다양한 창조활동을 벌일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다. 처음 개최되었을 때는 유럽의 디자이너들에게만 해당되는 상이었지만, 2회부터 전 세계 디자이너들로 범위가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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