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콜라는 세계적인 종합음료회사이다. '미국의 상징'이라고 불리기까지 하는 코카콜라는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음료수이다. 귀여운 북극곰(실제로는 엄청 무서운 북극곰)이 코카콜라를 마시는 광고는 우리 뇌리에 박혀, 아직도 북극곰이 제일 좋아하는 음료수가 코카콜라일 것만 같다. 지금부터 세계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료인 코카-콜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코카콜라의 원래 이름은 '코카-콜라(Coca-Cola)'지만 대부분 그냥 코카콜라로 쓴다. 코카-콜라를 발명한 사람은 약제사였던 존 펨버튼(John Pemberton) 박사이다. 미국 조지아 주 녹스빌 출신인 그는 원래 두통약을 만들려고 했는데, 계속 실패했다. 여러 재료를 혼합해 약품을 만드는데 재주가 있었던 팸버튼은 향긋한 양이 나는 캐러멜 색 액체를 개발했다. 그는 여기에 탄산수를 섞어 음료를 만들었는데 반응이 좋아서, 약국에서 팔기 시작했다. 펨버튼의 경리사원이었던 프랭크 M. 로빈슨(Frank M. Robinson)이 이 음료의 이름을 코카-콜라로 지어주고, 로고까지 만들어주었다. 로빈슨이 만든 이 로고는 현재까지 코카-콜라의 로고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펨버튼은 코카-콜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존 펨버튼은 1888년에 세상을 뜨기 전에, 코카-콜라의 사업지분을 여러 파트너들에게 쪼개서 팔았다. 이 파트너 중 한 명이 바로 아사 캔들러(Asa Candler)였다. 


아사 캔들러는 사업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그는 코카-콜라가 크게 성공할 수 있는 음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1892년에 코카-콜라의 모든 사업지분을 확보해, 코카-콜라의 로고를 만들었던 프랭크 M. 로빈슨과 함께 '코카-콜라 컴퍼니(Coca-Cola Company, TCCC)'를 설립했다. 이후 아사 캔들러는 무료 시음 쿠폰을 나눠주고 다양한 기념품을 만드는 등의 프로모션을 진행해서 코카-콜라를 널리 알리는데 주력했다. 덕분에 코카-콜라의 인기는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아사 캔들러는 1893년에 코카-콜라 상표권을 미국 특허청에 등록했다. 또한 1895년에는 시카코, 댈러스, 로스앤젤레스 등에 코카-콜라 원액 제조 공장을 세웠다. 원래 코카-콜라는 이름처럼 음료에 코카인 성분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코카인의 중독 문제가 계속 제기되자, 아사 캔들러는 코카-콜라의 원료에서 코카인을 1903년부터 제거했다. 코카-콜라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모조품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이에 코카-콜라 컴퍼니는 모조품과 확연히 구분되는 자신들만의 병을 개발하기로 마음먹고 1915년에 공모전을 진행했다. 공모전에서 당선된 것은 알렉산더 사무엘슨(Alexander Samuelson)과 얼 딘(Earl Dean)이 공동으로 디자인한 병이었다. 병의 이름은 '컨투어보틀'로 어둠 속에서도 윤곽을 쉽게 구분할 수 있는 허리가 잘록한 디자인이 특징이었다. 이 디자인은 특허를 받고, 다음해부터 시중에 본격적으로 판매되었다. 이 매력적인 디자인 덕분에 코카-콜라는 미국 음료 사업에서 독주를 하기 시작했다. 


코카-콜라 컴퍼니는 1919년에 '로버트 우드러프(Robert Woodruff)'에게 인수되었다. 우드러프가 코카-콜라를 인수한 후 부터 코카-콜라는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1920년대까지 코카-콜라는 중국, 필리핀, 홍콩, 중앙 아메리카, 유럽 등에 진출했다. 2차 세계대전이 1939년에 발발했을 때, 로버트 우드러프는 모든 미군이 배치되는 전장에 코카-콜라를 한 병 당 5센트에 공급했다.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군수물자 업체를 제외한 나머지 여러 사업들은 피해를 보는데 비해, 코카-콜라 컴퍼니는 오히려 전쟁 기간동안 10개가 넘는 해외 공장을 설립했다. 해외 각지에 나가있는 미군들에게 코카-콜라를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코카-콜라는 1945년에 끝난 2차 세계대전 동안 전세계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코카-콜라의 인기는 여전했고, 수요는 더욱 늘어났다. 코카-콜라 컴퍼니는 1960년대까지 전 세계에 64개의 공장을 추가 건설했다. 1960년대에 코카-콜라 컴퍼니는 꾸준히 인수합병을 진행해서 거대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1960년에 인수한 '환타(Fanta)'는 코카-콜라 컴퍼니를 더욱 성장시켰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글라소 비타민워터(Glaseau Vitaminwater)'를 인수하기도 했다.


현재 코카-콜라 컴퍼니에서 생산되고 있는 음료는 코카-콜라 오리지날 외에도 코카-콜라 라이트(Coca-Cola light), 파워에이드(POWERade), 쿠우(Qoo), 환타(Fanta), 코카-콜라 제로(Coca-Cola Zero), 스프라이트(Sprite), 미닛메이드(Minute Maid), 조지아커피(Georgia), Mello Yello, Fuze, Fresca 등이 있다. 이 중 코카-콜라는 다양한 맛으로 출시되었는데, 기존 오리지날 맛 외에도 코카-콜라 체리맛이나 코카-콜라 블랙체리 바닐라, 코카-콜라 오렌지 등이 있다. 또한 칼로리에 민감한 여성들을 위해 코카-콜라 라이트나 제로도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코카-콜라 컴퍼니는 기존 오리지날 맛에서 당도 함량을 줄인 뉴 코크(New Coke) 제품을 출시했다가, 소비자들의 반발로 2000년대에 생산을 중단하기도 했다.


한국에는 1950년대 6.25 전쟁 당시 미군들에게 코카-콜라가 공급되면서 처음 들어왔다. 1968년에 두산그룹 산하의 한양식품이 코카콜라 제조회사를 처음으로 운영해 구로구 독산동에 생산공장을 설립했으며, 그 후에는 여러 식품회사들이 지역별로 제조 회사를 운영했다. 이후 1997년에 현지 법인인 한국코카콜라 보틀링(주)가 설립되어 직영체제로 전환했다가, 2007년에 LG생활건강에 인수되었다. 현재는 코카콜라음료로 상호가 바뀌어 운영되고 있다. 


코카-콜라 브랜드의 가치는 약 700억달러가 넘으며, 이를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80조원에 육박한다. 하루에 소비되는 코카-콜라가 약 7억병이 넘는다고 하니, 코카-콜라가 전 세계에서 얼마나 인기를 얻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브랜드 가치를 측정하는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사인 인터브랜드(Interbrand)가 선정한 '글로벌 100대 브랜드'에서 2001년부터 12년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포춘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코카-콜라 컴퍼니가 4위에 오르기도 했다. 

별다방으로 불리는 스타벅스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 중인 카페가 바로 콩다방, '커피빈(The Coffee bean & Tea leaf)'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둘을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 편이지만, 미국에서는 커피빈과 스타벅스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사실 둘은 장르도 조금 다른 편인데, 커피가 중점인 스타벅스와는 달리, 커피빈은 커피 외에도 차 라인이 강세를 보인다. 물론 요새는 스타벅스도 다양한 메뉴를 출시하면서 구분이 좀 모호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지금부터 커피빈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커피빈의 정식 명칭은 '커피빈 앤드 티리프(The Coffee bean & Tea leaf)'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커피빈은 커피와 차를 판매하는 커피 및 홍차 전문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커피 및 홍차 전문점 중 하나인데, 최초의 매장은 1963년에 개설되었다. 커피빈의 설립자는 허버트 B. 하이만(Herbert B. Hyman)과 모나 하이만(Mona Hyman)이다. 그들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브렌트우드에 첫 매장을 오픈했는데, 이테오피아 등의 아프리카산 원두 외에도 라틴아메리카, 인도네시아, 콜롬비아 등 원산지에서 직접 들여온 최상급 원두만을 사용해서 커피 맛을 한층 끌어올렸다. 또한 홍차도 중국, 포모사, 인도, 실론, 스리랑카 등의 재배지역 농장에서 직접 원료를 공급받아서 블렌딩한다. 이렇게 최상의 품질을 추구하는 기업 마인드 덕분에 커피빈 앤드 티리프는 세계적인 커피 체인점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 전역에 퍼져있는 스타벅스와는 달리, 커피빈 앤드 티리프는 미국 남서부 쪽에 매장이 몰려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피닉스, 라스베거스, 호놀룰루, 텍사스, 알리바바, 마이애미, 디트로이트 등에 직영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로스앤젤레스와 샌디에고 등의 캘리포니아 쪽이 주요 거점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커피빈 앤드 티리프는 미국 지역에서는 대부분 직영으로 운영하지만, 그 외 지역들은 거의 프랜차이즈로 운영되고 있다. 


스타벅스의 프라푸치노가 1995년에 개발된 것 보다 훨씬 이전인 1987년에 커피빈 앤드 티리프는 얼음을 갈아 만든 음료인 아이스 블랜디드(ICE BLENDED)를 개발했다. 커피빈 앤드 티리프라는 이름답게 1998년에는 차이티라떼를 런칭했는데, 꽤 인기가 있는 편이다. 커피빈 앤드 티리프의 티라떼는 차를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진하게 우려내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커피빈 앤드 티리프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음료 파우더가 같이 혼합되어 달달하면서 진한 맛을 낸다. 가장 인기있는 파우더는 바닐라 파우더로, 바닐라 파우더가 들어간 메뉴는 대체로 추천할 만하다. 커피빈은 최상급 원두콩과 찻잎을 사용하는 고급이미지를 고수하고 있으며, 모든 콩과 찻잎을 현지 농장과 직수입해 사용한다. 현재 커피빈에서는 약 22종의 커피와 20종의 차를 판매하고 있다. 


커피빈 앤드 티리프는 동남아시아 쪽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싱가포르의 빅터 사순(Victor Sassoon) 사가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프랜차이즈 형태로 매장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커피빈코리아 주식회사가 2009년에 설립되어, 인터네셔널 커피빈 앤드 티리프(International Coffee $ tea leaf)와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었다. 커피빈 코리아는 커피빈 매장을 모두 직영으로 운영하며, 서울에만 약 70개의 매장이 운영되고 있다. 전국에는 약 140개 정도의 매장이 운영 중이다. 한국 1호 매장은 2001년 5월에 오픈한 학동역 매장이다. 전 세계에는 미국, 싱가포르, 이스라엘, 아랍 에미리트, 브루나이, 오스트레일리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쿠웨이트, 이집트, 중국, 일본, 요르단, 몽골, 오만, 파나마, 파라과이, 스리랑카, 베트남, 태국, 한국, 카타르, 필리핀, 독일, 그루지아 등에 퍼져있으며, 약 1,000개가 넘는 매장이 자리하고 있다. 본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지만, 커피빈코리아의 경우에는 미래에셋자산운용이 경영권 지분의 약 75%를 인수해서, 실질적으로는 한국 기업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커피빈 메뉴는 매우 다양한데, 홍차와 에스프레소 커피음료 외에도 티 라떼, Non-coffee Drink(초콜릿 음료, 스팀밀크 등), 아이스 블랜디드, 그 밖의 베이커리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커피빈 앤드 티리프의 여러 메뉴 중, 바닐라 파우더를 이용한 바닐라 라떼와 바닐라 바닐라 아이스 블랜디드는 언제나 인기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우리나라의 커피산업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이젠 식후 커피는 익숙한 문화가 되었고, 학생들도 카페에서 모임을 가진다.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이 있다. 이 중, 가장 인기가 많은 카페는 아마 스타벅스일 것이다. 한국 소비자원에서 조사한 결과에서 직원 서비스나 커피 맛 부문에서 스타벅스가 다른 카페 브랜드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지금부터 전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커피 전문점인 '스타벅스(Starbucks)'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스타벅스는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매장을 가지고 있는 세계적인 커피 전문점이다. 스타벅스의 시작은 미국 시애틀에서 커피 애호가였던 영어 교사 제리 볼드윈(Jerry Baldwin), 역사 교사 제브 시글(Zev Siegl), 작가 고든 바우커(Gordon Bowker)가 열었다. 대학 동창이었던 3명은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로부스터(Robusta) 원두 대신 아라비카(Arabica)원두를 즐겨 마셨다. 쓴 맛이 강한 로부스터에 비해 아라비카 원두는 부드럽고 향기가 뛰어난 것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북미 쪽에는 아라비카 원두를 판매하는 곳이 많지 않았기에, 셋은 직접 아라비가 원두를 판매하기로 했다. 그들은 1971년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스타벅스 커피, 티 & 스파이스(Starbucks Coffee, Tea & Spice)'라는 작은 커피원두 매장을 열었다. 스타벅스라는 이름은 미국 작가 허먼 멜빌(Herman Melvil)의 소설 '모비딕(Moby Dick)'에 나오는 포경선(고래잡이 배)의 일등 항해사의 이름인 스타벅(Starbuck)에 S를 붙여 만들었다. 그들은 테리 헤클러가 만든 로고를 자신들의 매장 로고로 사용했는데, 이 로고는 신화에 나오는 세이렌을 모티브로 했다. 세이렌은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들을 유혹해서 배를 난파시키는 반인반조였는데, 스타벅스 또한 커피로 사람들을 유혹하겠다는 뜻을 담아 로고로 사용했다. 처음 오픈한 스타벅스 매장은 커피원두와 커피기계 등을 판매했다. 그들은 창업 초기에는 원두 공급업체인 '피츠 커피&티(Peet's Coffee&Tea)'에서 원두를 공급받았다. 하지만 지역 일간지인 시애틀 타임스(Seattle Times)에서 스타벅스 커피, 티 앤 스파이스에 대한 기사를 실었고, 판매량이 급증했다. 이에 스타벅스 커피, 티 앤 스파이스는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직접 커피 재배업자들로부터 원두를 사들였다. 스타벅스 커피, 티 앤 스파이스의 매출은 나날이 증가했고, 1980년대까지 시애틀 인근 지역까지 매장을 연이어 열었다. 


스타벅스 커피, 티 앤 스파이스가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은 1982년, 마케팅 담당자로 '하워드 슐츠(Howard Schultz)'가 합류한 후 부터다. 하워드 슐츠는 스웨덴의 커피 메이커 제조회사인 해마플라스트의 미국 부사장을 맡고 있었다. 슐츠는 해마플라스트의 주요 고객사였던 스타벅스 커피, 티 앤 스파이스를 방문했는데, 그 때 스타벅스 설립자들의 열정에 반하게 되었다. 이후 슐츠는 스타벅스 커피, 티 앤 스파이스에 합류하고 싶다는 의지를 계속해서 표명했고, 마침내 1982년에 스타벅스 커피, 티 앤 스파이스에 합류하게 되었다. 하워드 슐츠는 스타벅스에 합류한 이후 이탈리아 밀라노에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이탈리아에서 강한 인상을 받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커피문화가 매우 발달되어 있는 나라이다. 슐츠는 이탈리아의 에스프레소 바에서 커피를 즐기며 휴식을 취하는 이탈리아인들을 보고, 이탈리아의 커피문화를 미국에 적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에서 커피는 집에서 직접 만들어 마시는 음료라는 인식이 강했다. 슐츠는 제리 볼드윈과 고든 바우커 등에게 스타벅스 커피, 티 앤 스파이스 매장 안에 에스프레소 바를 설치해서, 매장에서 바로 커피를 내려 판매하자고 제안했다. 시범적으로 운영한 에스프레소 바는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설립자들의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국 에스프레소 바 설치는 무산되었다. 결국 슐츠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서 스타벅스 커피, 티 앤 스파이스를 떠나게 되었다.


하워드 슐츠는 스타벅스 커피, 티 앤 스파이스를 떠나 1985년에 시애틀에 '일 지오날레 커피 컴퍼니(il Giornale Coffee Company)'를 설립했다. 일 지오날레 커피 컴퍼니에서 오픈한 첫 커피음료매장인 '일 지오날레'는 시카고에 생겼는데, 그 매장의 모습과 분위기는 이탈리아 에스프레소 바와 매우 흡사했다. 하워드 슐츠는 원두를 스타벅스 커피, 티 앤 스파이스에서 공급받았는데, 부드러운 아라비카 원두로 만든 커피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한다는 슐츠의 아이디어는 큰 인기를 모았다. 일 지오날레 1호 매장은 오픈 6개월만에 하루 천 명이 넘는 고객이 찾는 가게가 되었다. 하워드 슐츠는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일 지오날레 3호매장까지 열었고, 이후 스타벅스 커피, 티 앤 스파이스까지 인수하게 되었다. 마침 스타벅스의 경영진들이 스타벅스 커피, 티 앤 스파이스를 팔려고 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슐츠는 스타벅스 커피, 티 앤 스파이스를 인수한 뒤, 일 지오날레 커피 컴퍼니에 합병시키고 회사명을 '스타벅스 사(Starbucks Corporation)'으로 변경했다. 기존의 일 지오날레 매장들도 모두 '스타벅스(Starbucks)'로 이름이 바뀌면서, 지금의 스타벅스가 되었다. 하워드 슐츠는 모든 매장의 커피 맛이 균일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모든 스타벅스 매장은 '직영'으로 운영되고 있다.


스타벅스는 1992년에 북미대륙에만 165개의 매장이 있는 대형 프랜차이즈 업체로 성장했다. 스타벅스는 1994년에 '펩시코(PepsiCo.Inc)'와 합작해서 '북미 커피 파트너십(North American Partnership)'을 설립했는데, 이를 통해 스타벅스 병음료와 캔음료가 만들어졌다. 1995년에는 처음 얼음을 갈아만든 음료인 '프라푸치노(Frappuccino)'를 선보였고, 큰 인기를 끌었다. 다음 해에는 처음으로 북미 대륙을 넘어 일본, 싱가포르에 매장을 오픈했다. 1997년까지 스타벅스의 전 세계 매장은 1,000개가 넘었다. 스타벅스는 이후 중국, 쿠웨이트, 레바논, 한국, 영국, 스위스 등에도 매장을 개설하면서 2002년 기준으로 전 세계 매장이 5,000개가 넘었다. 현재는 64개국에서 총 23,000개가 넘는 매장이 운영 중이다. 한국에만 약 1,000개의 매장이 있다고 하니, 스타벅스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현재 본사는 워싱턴 주 시애틀에 위치하고 있고, 아직까지 하워드 슐츠가 회장직을 맡고 있다. 한국에는 신세계와 라이센스를 체결해서 스타벅스 본사와 신세계가 지분을 절반씩 가지고 있는 '스타벅스 코리아'를 설립했다.



이탈리아에 페라리가 있다면 독일에는 포르쉐가 있다고 할 정도로, 슈퍼카 라인에서 포르쉐는 엄청난 명성을 가지고 있다. 남자들의 로망이기도 한 포르쉐 스포츠카는 람보르기니, 페라리와 함께 세계 3대 스포츠카이다. 독일에서는 포어셔로 부르고, 미국에서는 폴시, 영국에서는 폴셰라고 발음하는 포르쉐에 대해서 지금부터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포르쉐의 설립자는 오스트리아의 자동차 설계사였던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이다. 포르쉐는 오스트리아 마퍼스토르프에서 태어나,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빈에서 전기자동차의 설계 및 제조에 성공했다. 그는 여러 유명 자동차회사에서 일하다가 1930년에 독립했다. 그는 1931년에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Dr. Ing. h. c. F. Porsche GmbH’라는 이름의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회사 설립 초기에는 자신의 이름을 건 자동차를 제작하지는 않았으며, 대신 주로 중형자동차 개발과 자문업무를 수행했다. 1936년에 히틀러에게 의뢰받은 보급형 차량의 시제품을 공개했다. 히틀러는 이 차를 KDF(Kraft durch Freude)라고 불렀는데, 이 뜻은 '기쁨의 힘'이었다. 하지만 포르쉐는 자신이 개발한 보급형 차량에 국민차라는 뜻의 '폭스바겐(Volkswage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미국에 출시된 폭스바겐 차량은 외관이 딱정벌레와 비슷하다고 하여 '비틀(Beetle)'이라고 불렸다. 비틀은 현재까지 2,100만 대 이상이 판매되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 best 10'에 이름을 올렸다. 1939년에 비틀의 여러 부품을 활용해 포르쉐 자신의 이름을 붙인 포르쉐 64가 처음으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레이스에 출전시키지는 못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전쟁 기간 동안 전투용 장갑차인 쿠벨바겐(Kubelwagen)과 슈빔바겐(Schwimmwagen)을 생산했다. 이 때문에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2차대전이 끝난 이후, 전범으로 체포되어 4년간 복역했다. 복역 중 병을 얻은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1951년에 사망하고, 그의 사업은 아들인 페리 포르쉐(Ferry Porsche)가 이어받았다.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복역을 마치고 죽기 진전에 개발한 마지막 차량이 바로 1949년에 만들어진 포르쉐 356이었다. 이 차량은 '점프하는 개구리'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이후 포르쉐에서 나오는 차량들에 전부 '개구리'라는 별명이 붙는다고 한다. 개구리라는 별명은 포르쉐 차량의 대부분이 후드에 둥근 라이트가 튀어나오듯이 디자인 되어있기 때문이다. 여하간 포르쉐 356은 출시 이후 17년간 약 7만 대가 넘게 판매되었다. 이후 포르쉐는 보급형 제품인 포르쉐 914와 924, 최고급 모델 928, 중저가 모델 944, 968 등 다양한 스포츠카를 제작했다. 이후 1963년에는 포르쉐 356의 후속 모델인 포르쉐 911이 출시되었다. 이 제품은 포르쉐하면 떠오르는 포르쉐의 주력제품이자 최고 인기 모델이다. 일반 슈퍼카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데는 무리가 있는 반면, 포르쉐 911은 왠만한 배기가스 규제를 모두 만족시키고, 과속방지턱 등의 다양한 요철지역을 무난하게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일상 사용이 가능한 슈퍼카이다. 심지어 승차감 또한 스포츠카 치고는 매우 편안하고, 내구성 또한 매우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드림카로 불린다. 그 외에도 매운 고추라는 뜻의 '포르쉐 카이옌' 또한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포르쉐 카이옌은 포르쉐가 처음으로 생산한 고성능 중형 SUV인데, 역대 포르쉐 자동차 누적 판매량 중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출시 초기에는 여러 평론가들에게 최악의 평을 받았던 카이옌이었지만, 뛰어난 성능과 포르쉐 네임 밸류 덕분에 소비자들에게 큰 주목을 받았다. 카이엔 시리즈의 여러 모델 중, 카이엔 터보는 제로백 4초 대에 최고속력 300km/h를 기록하는 만큼, 성능면에서는 거의 스포츠카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덕분에 포르쉐의 기존 스포츠카 제품들보다 높은 판매고를 올려, 포르쉐 사의 최고 효자 제품이 되었다.


포르쉐는 여러 슈퍼카 브랜드 중, 유일하게 자동차를 수작업이 아닌 기계생산으로 양산할 수 있는 기업이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익률을 내는 자동차회사이기도 하다. 현재 포르쉐는 고성능 스포츠카, 슈퍼카, 세단, SUV 등을 제조하며, 아우디, 폭스바겐, 벤틀리, 부가티, 람보르기니 등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폭스바겐그룹에 속해 있다. 주요 모델로는 포르쉐 911, 케이맨(Cayman), 파나메라(Panamera), 카이엔(Cayenne)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918스파이더(918 Spyder), 마칸(Macan), 박스터 등을 판매하고 있다.




파이저그룹은 미국의 유명 제약회사이다.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를 발명한 회사로도 유명하다. 비아그라 덕분에 수컷 바다표범과 순록의 포획량을 감소시켰다는 연구결과도 있는데, 이는 파이저그룹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지구 생태계 보호에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파이저그룹은 '인류와 동물을 위한' 제약회사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지금부터 파이저그룹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파이저그룹은 독일계 미국인인 찰스 파이저(Charles Pfizer)와 찰스 에르하르트(Charles Erhart)가 세운 기업이다.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 온 찰스 파이저와 찰스 에르하르트는 사촌지간이었는데, 이 둘이 뉴욕 브루클린에 '찰스 파이저 앤드 컴퍼니(Charles Pfizer and Company)'를 설립했다. 1849년에 설립된 이 찰스 파이저 앤드 컴퍼니가 바로 파이저그룹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찰스 파이저는 독일에서 원래 약제사 수련생으로 있으면서 화학을 공부했다. 여기에 제빵 기술을 배운 찰스 에어하트가 더해져, 찰스 파이저 앤드 컴퍼니는 정제약품을 개발하게 되었다. 찰스 파이저 앤드 컴퍼니에서 처음 개발한 제품은 바로 쓴 맛이 나지 않는 구충제인 산토닌(santonin)이었다. 산토닌으로 성공을 거둔 파이저는 1862년에 타르타르 산과 타르타르 크림을 미국 최초로 생산했다. 파이저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기에 큰 역할을 한 것은 1880년에 개발된 구연산이었다. 파이저는 레몬과 라임의 수입농축액을 원료로 한 구연산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고, 이를 음료업체에 납품했다. 구연산은 파이저의 주요 생산품목이 되었으며, 파이저를 큰 성공으로 이끌었다.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은 페니실리움(Fenicillium)에 속하는 푸른곰팡이에서 얻은 화학물질이 박테리아로 발생한 병을 치료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플레밍은 이 화학물질을 페니실린(Penicillin)이라고 이름지었다. 하지만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당시에는 페니실린을 다량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 또한 페니실린이 몸에 흡수된 후, 쉽게 배설이 되버렸기 때문에 질병 치료에 이용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1941년에 파이저의 존 데이븐포트(John Davenport)와 고든 크레그월(Gorden Cragwall)이 페니실린 관련 심포지움에 참가했다. 이후 파이저는 3년 동안 회사의 모든 자원을 페니실린이 실제 치료에 사용될 수 있도록 만드는데 쏟아 붓는 모험을 했다. 당시 2차 세계대전으로 전 세계는 대량의 페니실린이 필요한 상태였다. 파이저는 페니실린을 효과적으로 치료에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고, 미국정부는 이러한 파이저의 기술을 이용한 항생제 생산을 허가했다. 여러 업체에서 파이저의 공정을 따라했지만, 파이저의 기술력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같이 투입된 페니실린의 90%는 파이저의 제품이었다. 이후에도 파이저의 페니실린은 전쟁 기간 내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파이저가 페니실린을 대량생산하면서 페니실린의 가격은 하락했다. 이에 파이저의 수익도 감소할 수 밖에 없었다.


파이저는 1950년대에 들어서기 전까지 자사 제품의 원료를 다른 회사에 대량으로 판매하는 화학약품 제조업체였다. 하지만 1940년대 후반에 새로운 항생물질을 발견하면서 파이저의 자체 브랜드가 개발되었다. '테라마이신(Terramycin)'이라는 약품은 광범위 항생제로, 파이저의 독자적인 첫 약품이었다. 이때부터 파이저는 제약회사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후 파이저는 계속해서 항생제를 개발했는데, 테트라신(Tetracyn)이나 비브라마이신(Vibramycin) 등 이었다. 1959년에는 동물의약품 개발에도 진출했다. 파이저가 1980년에 출시한 소염진통제 펠덴(Feldene)은 관절염, 골격질환, 통풍 등에 특효가 있었는데, 이 제품은 파이저의 약품 중 최초로 10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1992년에는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처방받는 고혈압 치료제인 노바스크(Norvasc)를 출시하기도 했다. 파이저는 그 외에도 당뇨병 치료제인 글루코트롤(Glucotrol), 동물 약품인 애드보신(Advocin)과 아비엑스(Aviaz), 덱토맥스(Dentomax), 협심증 및 고혈압 치료제는 프로카디아 XL(Prodardia), 항진균성약인 디푸루칸(Diflucan) 등을 출시했다. 이런 여러가지 약품을 출시하면서 파이저는 세계에서 알아주는 제약업체가 되었으며, 1997년에는 포춘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제약회사'에 뽑히기도 했다.


하지만 파이저를 현재의 위치에 올려놓은 것은 다름 아닌 '비아그라(Viagra)' 였다. 비아그라는 발기부전 치료제로 전 세계 성기능장애 환자들의 희망이 되었다. 하지만 파이저는 처음부터 발기부전 치료제를 개발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파이저는 협심증 치료제를 개발 중이었는데, 협심증 치료를 위해 개발한 비아그라의 성분이 의외로 발기부전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파이저는 정력이라는 의미의 비거(vigor)와 나이아가라(Niagara) 폭포의 이름을 합쳐 '비아그라'라는 이름으로 발기부전 치료제를 출시했다. 하지만 이름처럼 비아그라가 정력제는 아니었다. 단지 발기를 강제적으로 도와주는 약품이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비아그라는 엄청난 판매량을 세웠고, 비아그라 덕분에 그동안 정력제로 알려져왔던 수컷 바다표범의 성기나 순록의 뿔의 판매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비아그라가 생태계를 유지하는데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 비아그라는 2000년에 전 세계 성기능장애 의약품 판매량의 90%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파이저는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여러 제약업체들을 인수하면서 회사의 규모를 키웠다. 워너 램버트(warner Lambert)나 파머시아(Pharmacia), 와이어스(Wyeth)등의 회사가 파이저와 합병되었다. 1999년에 파이저는 포브스지가 선정한 '올해의 기업'으로 파이저가 뽑히기도 했다. 파이저는 2004년에 세계적인 산업 지표인 다우존스 공업평균지수에 포함되면서, 최고의 제약업체로 인정받았다. 현재까지 파이저는 HIV 치료제나 금연 치료제, 다중표적항암제 등 다양한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또한 저소득층 미국인들을 위한 '더 파이저 포 리빙 쉐어 카드 프로그램(The Pfizer for living share card program)'을 선보이며, 저소득층 미국인들에게 매월 15달러 상당의 파이저 약품을 처방하는 등 여러 사회공헌도 행하고 있다.

아스피린만큼 전세계인이 많이 먹는 진통제가 있으니, 바로 타이레놀이다. 이 타이레놀을 제조하는 회사는 '존슨앤드존슨(Johnson & Johnson)'이다. 우리에게 존슨앤드존슨은 제약회사보다는 존슨즈베이비나 뉴트로지나 등 보습제를 만드는 회사로 더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존슨앤드존슨은 세계 1위의 제약회사로, 다우 존스 산업평균지수를 구성하는 30개 기업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존슨앤드존슨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존슨앤드존슨'이라는 사명은 창립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존슨앤드존슨은 로버트 우드 존슨(Robert Wood Johnson)과 그의 두 형인 제임스 우드 존슨(James Wood Johnson), 에드워드 미드 존슨(Edward Mead Johnson)이 함께 설립했다. 이들은 1886년에 외과용 붕대와 거즈를 생산하는 공장을 뉴저지주에 있는 뉴브런즈윅에 세웠다. 초대 사장은 로버트 우드 존슨이 맡았다. 존슨 가 형제들이 공장을 만들 당시에는 미국에 큰 병원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존슨앤드존슨의 외과용 붕대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10년 초대 사장인 로버트 우드 존슨이 사망하고, 뒤를 이어 제임스 우드 존슨이 1932년까지 대표직을 맡았다. 이후 로버트 우드 존슨의 아들인 로버트 우드 존슨 2세가 가업을 이어받았다. 제임스 우드 존슨 때부터 존슨앤드존슨은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1920년대에 소비재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이후 여러 제약회사를 인수해 제약 부문도 확대했다. 또한 1970~80년대에는 여성용품과 욕실용품도 생산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현재 존슨앤드존슨은 소비재(타이레놀, 모트린, 리치 칫솔, 벤드에이드 반창고, 클린 앤 클리어, 존슨즈 베이비 로션, 리스테린, 니조랄 등), 전문용품(아큐브 콘택트렌즈, 수술 기구, 관절 대용품 등), 의약품(암 치료제 에르가미솔, 경구피임약 오소노붐 등) 등의 분야에서 최고의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신기한 것은 우리가 쓰고있는 '반창고'라는 것을 처음 상용화한 곳이 바로 존슨앤드존슨이라는 것이다. 원래 반창고는 얼 딕슨이라는 사람이 개발했는데, 존슨앤드존슨이 로열티를 주고 상용화했다. 


그 외에 존슨앤드존슨의 대표품목인 타이레놀도 우리가 잘 아는 제품이다. 타이레놀은 아세트아미노펜(Acetaminophen)이 단일성분인 진통해열제로, 1950년대에 존슨앤드존슨에서 개발했다. 아세트아미노펜은 타이레놀 외에도 펜잘큐나 게보린, 판피린, 암씨롱 등의 주성분이기도 하다. 아세트아미노펜은 아스피린의 아세틸 살리실산에 비해 항염 효과는 적으나, 진통 및 해열 효과가 뛰어났기 때문에 열이 나거나 통증이 있을 때 널리 쓰이고 있다. 존슨앤드존슨은 타이레놀이 아스피린의 부작용을 제거한 진통제라고 광고해서, 미국 내 진통제 시장점유율을 35%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 타이레놀에 누군가가 독극물을 주입해 사람들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1982년, 사건이 일어났던 해에 타이레놀은 정제형과 캡슐형으로 시판되고 있었다. 이 중, 캡슐형 타이레놀에 누군가가 청산가리를 몰래 투입했고, 이 제품은 그대로 판매가 되었다. 소매단계에서 일어난 일이라, 존슨앤드존슨에게는 책임이 없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또한 해당 사건으로 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모두 시카고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미국정부는 시카고 지역에 배포되었던 타이레놀만 수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슨앤드존슨의 타이레놀 시장점유율은 7%까지 급락했다. 사상 최악의 위기상황을 맞게 된 존슨앤드존슨은 엄격한 조치를 취했다. 먼저 타이레놀의 생산과 광고를 모두 중단하고, 미국에서 시판되고 있는 모든 타이레놀을 수거했다. 또한 캡슐형으로 판매되었던 타이레놀 제품을 모두 정제형(알약)으로 교환해준다는 광고를 지속적으로 내보냈다. 당시 미국에 판매되고 있던 타이레놀은 약 3000만병이 넘었고 그 금액만도 1억 달러 정도였다. 존슨앤드존슨은 이에 그치지 않고, 언론의 취재에 적극 협조하면서 실시간으로 사건 관련 정보를 제공했다. 존슨앤드존슨은 언론을 통해 '만일의 사고를 대비해 타이레놀의 복용을 중지하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또한 타이레놀 관련 상담라인을 따로 구성해서, 소비자들의 질문에 발 빠르게 대응했다. 이러한 대응 덕분에 존슨앤드존슨이 수거한 타이레놀 중, 75개의 캡슐형 타이레놀에서 독극물이 검출되었다. 또한 8명의 사망자 이후 더 이상의 사상자는 없었다. 이후 범인이 체포되었음에도 존슨앤드존슨은 사건관련 위기관리위원회를 구성해서 사후처리문제 등을 수행했다. 언론과 대중들은 존슨앤드존슨의 이러한 대처를 매우 훌륭하고 책임감 있는 행동이라고 평가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존슨앤드존슨의 대처에 대해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준 존슨앤드존슨은 대중을 보호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평을 내렸다. 덕분에 존슨앤드존슨은 위기를 극복하고, 오히려 '신뢰가 가는 기업', '고객을 생각하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존슨앤드존슨은 처음 설립 당시, 14명의 직원과 존슨 형제 3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직원수만 무려 12만명이 넘는 대기업이 되었다. 본사는 아직까지 뉴저지 주의 뉴브런즈윅에 있으며, 현재 CEO는 앨릭스 고스키이다. 한국에서는 1983년에 한국존슨앤드존슨이 설립된 이후, 존슨앤드존슨컨슈머, 한국얀센, 존슨앤드존슨메디칼, 존슨앤드존슨비젼케어가 독립법인체로 운영되고 있다. 이 중, 한국얀센은 유한양행과 얀센 사가 합작형태로 설립한 회사이며, 얀센 사가 1961년에 존슨앤드존슨에 인수되면서 한국얀센도 존슨앤드존슨의 독립법인체가 되었다.

바이엘은 독일의 유명 제약 및 화학 회사이다. 흔히 아스피린을 만든 회사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바이엘 사에서 근무하던 펠릭스 호프만이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해열진통제인 아스피린을 개발했고, 덕분에 바이엘은 세계적인 제약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바이엘 사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바이엘이란 기업명은 설립자인 프리드리히 바이엘(Friedrich Bayer)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염료 세일즈맨이었던 프리드리히 바이엘은 1863년에 염료 장인인 요한 프리드리히 베스코트(Johann Friedrich Weskott)와 함께 염료기업을 세웠다. 염료기업의 이름 또한 프리드리히 바이엘(Friedrich Bayer & Co)였다. 두 설립자가 회사를 운영하는 동안에는 바이엘은 그저 화학염료를 생산하는 기업일 뿐이었다. 1880년에 프리드리히 바이엘이 사망하고, 1년 뒤에 요한 베스코트도 사망했다. 프리드리히 바이엘의 사위였던 카를 룸프가 회사를 이어받았는데, 그는 회사 이름을 '파르벤 파브리켄 포어말스 프리드리히 바이엘(Farbenfabriken vorm. Friedr. Bayer & Co)'로 바꾸고, 회사를 확장했다. 카를 룸프는 회사를 연합 주식회사로 변화시켰는데, 이 덕분에 바이엘 사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카를 룸프는 회사의 성장을 위해서는 젊은 화학자들이 육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이엘 사는 젊은 인재들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페나세틴'이라는 해열제를 개발한 카를 뒤스베르트(Carl Duisberg)였다. 페나세틴은 아세트페네티딘이나 p-아세트아미노페네톨이라고도 하는데, 발열성 질환이나 감기, 두통, 류머티즘, 생리통 등에 사용할 수 있는 진통제였다. 하지만 극약 성분이기 때문에 신독성 등을 야기할 수 있었다. 어쨌든 페나세틴은 당시 여러모로 사용이 가능한 진통제였기 때문에 많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파르벤 파브리켄 포어말스 프리드리히 바이엘 사는 의약품 사업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1897년에는 바이엘 사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펠릭스 호프만(Felix Hoffmann)이 아세틸살리실산을 개발했다. 원래 살리실산은 그 전 부터 해열과 진통에 효과적인 약제로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특유의 쓴 맛과 여러 부작용 때문에 많은 화학자들은 살리실산을 좀 더 쉽게 복용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펠릭스 호프만 박사는 살리실산은 아세틸화 시켜서 '아세틸살리실산'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아스피린(Aspirin)'이다. 파르벤 파브리켄 포어말스 프리드리히 바이엘은 아스피린 덕분에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바이엘 사는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1차 대전이 시작되고, 해외 수출에 의존도가 높았던 바이엘 사는 판매량이 급격하게 감소하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20년대에 들어서 바이엘 사는 타 기업과의 합병을 추진했다. 바스프(BASF), 훽스트(Heoechst) 등 6개의 기업이 합병하여 유럽 최대의 화학회사인 '이게 파르벤(I.G.Farbeni-industrie AG.)'을 설립했다. 이게 파르벤은 2차대전 당시, 나치를 후원하고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들을 학살하는데 사용된 가스를 제조했다. 나치 전쟁 범죄에 동참하면서 이게 파르벤은 엄청난 이득을 취했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끝나고, 연합군은 독일계 회사였던 이게 파르벤을 12개사로 분할 및 해체시켰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파르벤 파브리켄 바이엘(Farbenfabriken Bayer AG)'이었다. 바이엘 사는 독립된 이후 석유화학 산업 쪽에 집중했다. 이후 사업이 안정적으로 변하자, 바이엘 사는 석유화학 산업 외에도 심혈관 질환 관련 약품이나 피부 향균 등에 관한 제품을 개발했다. 1972년에 현재의 회사명인 바이엘(Bayer AG)로 이름을 변경했다. 또한 이 당시, 미국의 제약회사였던 Cutter Laboratories와 Miles Laboratories를 인수해서 미국 제약시장에서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중 Cutter Laboratories는 바이엘 사의 자회사인 커터 바이올로지컬(Cutter biological)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여기서 1980년대 중반에 개발한 약품이 바로 혈우병 환자들을 위한 혈액응고제인 팩터VIII 농축액이었다. 하지만 이 제품이 에이즈 바이러스 검사를 거치지 않고 사용되어 문제가 되면서, 결국 바이엘 사는 혈우병 환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해야 했다. 바이엘 사는 여러 난관 속에서도 성장해서 1990년대에 들어서는 아스피린 공장을 동독 비터필드에 설립했다. 또한 토론토의 Polysar Rubber Co.와 합병을 해서 세계 최대의 고무 원료 공급회사가 되었다. 2000년대에는 화학회사였던 Lyondell Chemical Co.를 인수해서 세계 최대 폴리우레탄 원료 생산업체가 되었다. 2012년에는 기업 지속가능성 부문에서 세계 3대 화학기업이자 독일 최고의 화학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바이엘 사는 현재 세계 150여 개국에 350여 개의 자회사를 두고 있다. 사업분야는 크게 건강, 농업, 고분자 재료 분야로 구성되며, 인체 의약품이나 동물 의약품, 식물 보호제, 가정용 살충제, 폴리우레탄, 폴리카보네이트, 도금 및 접착제 등을 생산하고 있다. 물론 가장 유명한 제품은 '아스피린'이다. 바이엘 사는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레버쿠젠을 연고로 하는 축구 클럽을 1904년에 창단하기도 했다. '바이엘 04 레버쿠젠'이란 이 축구클럽은 독일 분데스리가 1부에 소속된 프로축구클럽으로 오랜 역사를 지녔으나, 한번도 분데스리가에서 우승을 하지 못했다. 한국 선수로는 차범근이 1983년부터 89년까지 활약했으며, 그 외에 손흥민, 류승우 같은 선수가 이 클럽에 소속되었다. 

여자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하는 가방은 무엇일까? 한 설문조사에서 1위를 한 가방이 바로 에르메스의 버킨 백이라고 한다. 천만원을 호가하는 이 백이 여성들의 로망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심지어 엄청난 가격에도 불구하고 예약을 하지 않으면 구입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니, 에르메스에 대한 궁금증은 더해져만 간다. 지금부터 에르메스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면서 에르메스가 전 세계 여성들의 로망이 된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에르메스는 1837년 티에리 에르메스가 프랑스 파리에서 오픈한 작은 마구용품 가게로 시작하였다. 피혁공이었던 티에리 에르메스는 1800년대에 주요 교통수단으로 사용되던 마차에 필요한 여러 물품들을 직접 만들어 판매했는데, 그의 기술은 매우 뛰어났다. 그는 1867년 만국박람회에 자신이 만든 마구 제품을 출품해서 최고상을 수상했다. 덕분에 티에리 에르메스는 부유층 고객들을 자신의 고객들로 끌어모을 수 있었다. 티에리 에르메스에게는 샤를 에밀 에르메스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티에리 에르메스가 사망한 해인 1878년에 만국박람회에서 또 한 번 최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샤를 에밀 에르메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업을 물려받았고, 1880년에 매장을 프랑스 엘리제궁 근처로 이동했다. 엘리제궁 근처 포부르 생토노레 24번가는 부유층 고객들이 드나들기 쉬운 장소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에르메스 브랜드는 고급화 전략을 취하게 되었다. 에르메스에서 만드는 수작업 제품들은 하나같이 질이 좋았기 때문에 평판도 좋은 편이었다.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 외에도 일본의 군주들까지 에르메스의 제품을 사용했다. 에르메스는 시대가 바뀌면서 마차에서 철도로 교통수단이 변화하자, 마구용품 대신 여행용품이나 생활용품 쪽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샤를 에밀 에르메스의 두 아들인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와 아돌프 에르메스가 1902년에 사업에 참여했다. 이 중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가 사업을 이어받으면서, 에르메스 사는 본격적으로 패션 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에밀 모리스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 파견을 나갔는데, 그 때 유럽에는 전해지지 않았던 지퍼 장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에밀 모리스는 프랑스로 돌아와 '지퍼'에 대한 전매권을 획득해, 다양한 제품에 활용했다. 이 때, 처음 나온 제품이 바로 '볼리드' 였다.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첫 지퍼 잠금 가방이었다. 에밀 모리스는 미국에서 가방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돌아와, 가죽을 이용한 다양한 제품을 선보였다. 1922년 세계 최초로 가죽 핸드백을 만든 곳도 바로 에르메스였다. 이 외에도 실크스카프나 벨트, 장신구, 향수 등 다양한 패션제품을 생산해 인기를 끌었다. 에르메스는 마구상으로 시작한 브랜드이기 때문에, 마구를 만드는데 필요한 다양한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에밀 모리스는 이 기술들을 핸드백이나 여행가방을 만드는데도 활용해서 더욱 고급스럽고 튼튼한 제품을 생산했다. 1929년에는 에르메스의 첫 여성복 라인이 출시되었다. 1930년대 대공황이 일어나면서, 전 세계의 경제성장이 주춤했다. 이 시기에 에르메스는 단순하면서도 사용 용도가 분명한, 오랫동안 사용이 가능한 튼튼한 제품들을 선보였다. 현재 에르메스의 대표 상품이 된 캘리백, 브리프케이스, 기자용가방, 승마복 등은 전부 이 시기에 만들어진 제품이었다. 캘리백은 처음부터 캘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1935년에 첫 출시되었던 가죽 핸드백을 모나코의 왕비인 그레이스 캘리가 임신한 배를 가리기 위해 사용한 것이 잡지에 실리면서 '캘리백(Kelly bag)'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제품은 현재까지 에르메스의 대표 상품으로 활약하고 있다. 에밀 모리스는 1945년에 현재까지 에르메스의 로고로 사용되고 있는 사륜마차 로고(깔레쉬)를 상표로 등록했다. 


에밀 모리스의 사위인 로베르 뒤마가 사업을 물려받고, 에르메스의 성장세는 잠시 주춤한다. 현재 에르메스의 상징이기도 한 오렌지색 포장박스나 에르메스의 첫 향수인 '오드 에르메스' 등이 모두 이 시기에 나왔다. 하지만 다른 경쟁기업들이 워낙 빠른 성장세를 보이던 때라, 에르메스는 상대적으로 성장세가 둔화된 모습이었다. 이런 에르메스를 바꾼 것은 티에리 에르메스의 5대손인 장 루이 뒤마 에르메스였다. 그는 1978년에 대표자리에 오른 후, 시계부문 자회사인 라 몽트르 에르메스를 스위스에 설립하고, 에르메스의 실크, 가죽, 기성복 라인을 발전시켰다. 또한 팔찌, 자기, 크리스탈 등 제품을 확대하여 에르메스의 제 2의 전성기를 불러왔다. 장 루이 뒤마 회장은 이후 패션디자이너와의 교류를 통해 에르메스의 전통에 현대적 감각을 추가하고자 했다. 그는 베로니크 니샤니안이나 마틴 마르지엘라, 피에르 하디, 장 폴 고티에 등의 디자이너를 영입해서 남성복, 여성복, 주얼리 라인 등을 재정비했다. 이 중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tier)는 에르메스의 수석 디자이너로 8년간 활약하며 에르메스를 크게 성장시켰다. 장 루이 뒤마 회장은 2006년에 사임하고, 그 뒤를 이어 에르메스 사의 첫 번째 전문 경영인인 파트릭 도마(Patrick Thomas)가 CEO로 임명되었다. 2011년에는 새로운 수석디자이너로 크리스토프 르메르(Christophe Lemaire)가 선임되었다. 2014년 3월에 악셀 뒤마 에르메스가 새로운 CEO가 되면서, 에르메스 사는 다시 오너 체제로 변경되었다.


에르메스는 전통의 가죽제품 외에 맞춤복, 기성복, 악세서리, 향수, 문구류, 자기류, 은식기류 등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상품으로는 단연 '캘리백'과 '버킨백'이 있다. 버킨백은 장 루이 뒤마 회장이 영국 출신 모델인 제인 버킨과 비행기에 동석하면서 만들어졌다. 제인 버킨의 가방 안의 물건들이 엉망으로 뒤섞여있는 것을 본 장 루이 뒤마 에르메스는 수납이 가능한 포켓이 가방 안에 부착된 가방을 만들어 주었는데, 이것이 '버킨백'이 되었다. 버킨백은 일주일에 2개 정도만 만들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희소가치가 있는 제품이다.


에르메스는 광고에는 많은 돈을 투자하지 않는다. 제품의 질만으로 승부하자는 에르메스 가의 오랜 철학 덕분에, 에르메스는 광고 대신 전시회 등 문화행사에 더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다. 에르메스는 2008년에 순수문화를 지원하기 위한 에르메스 재단을 설립해서 운영하고 있다. 에르메스 재단은 3년에 한 번 씩 에밀 에르메스 상을 주최하고 있는데, 신진 디자이너들이 응용 미술과 디자인 부문 쪽에서 다양한 창조활동을 벌일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다. 처음 개최되었을 때는 유럽의 디자이너들에게만 해당되는 상이었지만, 2회부터 전 세계 디자이너들로 범위가 넓어졌다. 

2016년도에 유행했던 폴로셔츠가 올해에도 유행할 전망이라고 한다. '폴로 셔츠'하면 생각나는 브랜드가 바로 폴로 랄프 로렌이다. 폴로 랄프 로렌은 미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인, 랄프 로렌이 만든 브랜드이다. 상류층이 주 타겟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강하다. 3초에 한 장 씩 판매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 랄프 로렌의 폴로 셔츠는 스포츠룩의 대명사이다. 지금부터 폴로 랄프 로렌에 대해서 자세히 파헤쳐보기로 한다.



랄프 로렌은 원래 뉴욕 브롱스에서 태어난 유대인 이민자 출신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랄프 리프시츠였지만, 자신이 스스로 성을 로렌으로 바꾸었다. 그는 아메리칸 클래식의 대표 브랜드인 '브룩스 브라더스(Brooks Brothers)'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이 만든 '폴로'라는 이름의 넥타이가 생각보다 반응이 좋자, 자신이 직접 브랜드를 런칭하기로 마음 먹는다. 1967년에 랄프 로렌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작은 매장에서 '폴로'라는 브랜드 이름을 걸고 타이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후 1968년에 남성복 라인으로 판매 제품을 확대했다. 뉴욕의 블루밍데일즈 백화점은 랄프 로렌의 남성복이 인기를 끌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래서 백화점은 폴로 브랜드의 부티크인 '폴로 바이 랄프 로렌(Polo by Ralph Lauren)'을 백화점 내에 열어주었다. 폴로 남성복 라인은 미국시장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1971년에 랄프 로렌은 첫 여성용 테일러드 셔츠를 출시했는데, 이 때 여성용 셔츠 커프스에 폴로 포니 로고를 처음 채택했다. 폴로 선수가 채를 들고 있는 모습의 이 로고는 현재까지 폴로 랄프 로렌의 상징이 되고 있다. 폴로 제품은 큰 인기를 얻었고, 미국 상류층의 상징물처럼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 때 브룩스 브라더스와 폴로의 법적 마찰이 생긴다. 원래 '폴로'라는 이름의 옥스퍼드 셔츠를 판매하고 있던 브룩스 브라더스는 랄프 로렌의 '폴로'브랜드가 자신의 제품명을 따라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랄프 로렌은 브랜드명을 폴로에서 '폴로 랄프 로렌'으로 변경했다. 후에 랄프 로렌은 브룩스 브라더스로부터 '폴로'라는 상표권을 사들였지만, 아직까지도 브랜드명을 '폴로 랄프 로렌'으로 유지하고 있다. 폴로 랄프 로렌은 1972년에 여성복 라인을 출시했고, 이 또한 큰 성과를 얻는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라코스테' 브랜드에서도 폴로 셔츠와 비슷한 디자인의 셔츠를 판매하고 있다. 본래 피케 니트 셔츠의 원조는 라코스테였다. 하지만 라코스테는 당시에 3가지 색상으로밖에 셔츠를 제작하지 않았다. 이에 랄프 로렌은 폴로 니트 셔츠를 제작하고 색상을 24가지나 제시했다. 원래 폴로 셔츠 자체가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컬러의 셔츠가 새로 출시되자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다. 이 제품은 오늘날까지 폴로 랄프 로렌의 대표 라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폴로 랄프 로렌은 상류층을 위한 디자인과 다양한 테마의 아메리칸 스타일을 제시하고 있다. 폴로 랄프 로렌의 매장은 전세계에 자리잡고 있는데, 각 매장의 인테리어는 매우 고풍스럽다. 이 인테리어는 본사에서 직접 가이드를 제시해서 관리하기 때문에, 세계 어느 매장을 가도 폴로 랄프 로렌만의 고급스러운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폴로 랄프 로렌의 매장 중 최고로 꼽히는 매디슨 애비뉴의 '라인랜더 맨션 남성 플래그십 스토어'는 1983년에 오픈했다. 이 매장에는 폴로 랄프 로렌의 모든 제품이 입점되어 있다. 이 매장은 오픈 첫 주에 10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얻었다. 상류층을 겨냥한 매장이기 때문에, 매장의 소품들은 모두 미국과 유럽 각지에서 공수한 골동품들로 꾸며져 있다. 또한 직원들도 대부분 상류층 출신으로, 3개월간 교육을 받은 후 투입되었다.


폴로 랄프 로렌은 특히 광고를 잘 활용하는 브랜드이다. 폴로 랄프 로렌의 모토인 '패션이 아니라 스타일이다(Style, not fashion)'이란 문구는 1977년에 폴로 랄프 로렌이 직접 배포한 광고책자에 있는 문구이다. 이 문구는 이후 폴로의 대표 문구가 되었다. 폴로 랄프 로렌의 광고는 대체로 영화같은 느낌이 강한데, 이는 랄프 로렌이 영화에서 많은 디자인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광고는 유명 사진작가 '브루스 웨버(Bruce Weber)'와 폴로 랄프 로렌이 만나면서 정점을 찍는다. 브루스 웨버는 미국을 대표하는 패션사진작가로, 의상을 삶의 매력적인 부분으로 표현시키는데 특출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브루스 웨버가 제작한 폴로 랄프 로렌의 광고 이미지는 폴로 제품을 입는 다양한 남성상을 영화처럼 표현했고, 이는 폴로 랄프 로렌의 브랜드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웨버는 폴로 랄프 로렌 뿐만 아니라 캘빈 클라인, 베르사체 등 다양한 브랜드의 광고 사진을 작업했다.


현재 폴로 랄프 로렌에서는 의류 뿐만 아니라 안경, 향수, 심지어 가구까지 생산하고 있다. 폴로 랄프 로렌은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미국 대표팀의 공식 유니폼을 제작하기도 했다. 현재 폴로 랄프 로렌의 본사는 뉴욕에 위치하고 있다. 랄프 로렌은 1992년에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회(CFDA)에서 처음 수여한 '평생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235위의 부자로 랭크되어 있다. 랄프 로렌은 2015년에 CEO자리를 스테판 라르손에게 넘기고, 랄프 로렌 법인의 회장 및 최고창의성책임자 직위를 맡고 있다. 금융 위기 이후, 다양한 스파브랜드들의 활약 속에 폴로 랄프 로렌의 입지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아직도 클래식 아메리칸 스타일하면 폴로 랄프 로렌이 떠오른다.

바로 전에 포스팅했던 'US스틸'에서 카네기가 항상 견제하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존 데이비슨 록펠러이다.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을 운영하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스탠더드 오일이라는 회사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1911년 미연방 법원이 스텐더드 오일 사가 미국의 반독점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회사를 여러 회사로 독립시키라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스탠더드 오일은 각기 모빌오일(Mobil Oil Corporation), 콘티넨털 오일(Continental Oil Company), 아모코(Amoco Corporation), 엑슨모빌(Exxon mobil Corporation) 등으로 쪼개졌다. 하지만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기업 중에 하나이다. 스탠더드 오일을 설립한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지구 역사상 가장 많은 부를 얻은 사람으로 꼽힌다. 심지어 클레오파트라, 나폴레옹,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등 수많은 부자들을 제치고 당당히 세계 1위의 부자 자리를 차지했다. 그의 자산은 현재 빌 게이츠의 전재산의 3배에 가깝다고 하니, 록펠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부터 스탠더드 오일 사에 대해 알아보면서, 미국의 근대 경제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뉴욕 리치퍼드에서 태어난 록펠러는 원래부터 부자는 아니었다. 그는 클리블랜드의 센트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휴이트 앤드 터틀'이란 회사에서 경리부 직원으로 취업했다. 그는 거기서 회계장부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그 때의 습관이 록펠러의 성공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최고의 부자가 된 후에도 그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장부를 기입했다고 한다. 그는 이후에 친구와 함께 1895년에 상사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1863년에 부업으로 클리블랜드에 정유소를 설립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그가 부자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정유소는 파산 직전까지 갔었다. 당시 미국의 철도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미국의 철도수송시장을 장악했던 코넬리우스 벤더빌트는 돈의 흐름을 파악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원래 선박업으로 돈을 벌었는데,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선박수송보다는 철도수송이 더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가지고 있던 모든 선박을 팔아서 철도에 투자했다. 그의 전략은 100% 맞아서 그는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 그는 미국 최대 단일 철도회사를 가졌는데,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는데, 그것은 바로 등유 수송이었다. 등유가 막 개발되기 시작해서 조명이 발달하는 시기였다. 벤더빌트는 앞으로 등유가 더 많이 필요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래서 벤더빌트는 등유를 독점 수송할 계획을 세우는데, 그 때 마침 벤더빌트의 눈에 든 것이 바로 존 데이비슨 록펠러였다. 벤더빌트의 눈에 록펠러는 그저 평범하고 파산 직전에 내몰린 정유소 사장일 뿐이었다. 벤더빌트는 그를 이용하고자 클리블랜드에서 자신의 회사까지 올 수 있도록 기차표를 예매해주었다. 록펠러는 미국 최고의 부자가 자신과 협상을 하고자 하니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그는 벤더빌트가 예약해준 열차를 놓치고 만다. 그런데 그 열차가 사고가 나면서 탑승자 대부분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록펠러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는데, 그는 이 사고를 보고 자신이 선택받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감을 가지게 된 록펠러는 벤더빌트를 만나러 가서 누구보다 당당한 모습으로 벤더빌트와 협상을 진행했다. 벤더빌트는 자신감 넘치는 록펠러를 믿고 그와 계약을 했다. 그런데 사실 록펠러는 벤더빌트와 계약한 만큼의 등유를 생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계약을 위반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록펠러는 투자자들을 모아 '스탠다드 오일'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그는 투자받은 돈으로 등유 생산량을 높이고 정유시설이나 보관창고 등도 업그레이드했다. 덕분에 록펠러는 벤더빌트와의 계약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게 된다. 록펠러는 승승장구하여 미국 최대의 등유생산자가 되었다. 록펠러는 록펠러의 등유 생산량은 어느새 벤더빌트의 수송능력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때 록펠러에게 접근한 것이 바로 철도업자인 탐 스캇과 그의 제자인 앤드류 카네기였다. 탐 스캇은 제자와 함께 클리블랜드의 스탠다드 오일 사를 방문해 록펠러를 만나 자신들과도 계약을 하자고 제안했다. 록펠러는 이에 벤더빌트와 스캇을 경쟁시켜서 등유 운송비가 줄어들게 했다. 운송비를 절약하고 등유를 판매한 돈이 넘치자, 록펠러는 그 돈으로 다른 정유사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록펠러는 결국 나이 33세 때, 미국 최고의 석유왕이 되었다. 그가 공급하던 석유 물량이 북미 석유 전체의 90%가 넘었다. 록펠러는 계속 돈을 버는데, 스캇과 벤더빌트는 운송비를 저렴하게 받으니 상대적으로 적은 돈을 벌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둘은 담합을 해서 운송비를 높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록펠러는 막대한 자금력으로 대규모 송유관을 건설해, 직접 석유를 운송하기 시작했다. 록펠러의 석유를 더이상 운송할 수 없게 되자 미국의 철도산업은 순식간에 무너지게 되었다. 철도산업이 무너지자 미국에는 엄청난 경제불황이 닥치게 되었다. 수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게 되었고, 많은 철도회사가 파산했다. 이것이 바로 1873년 일어난 미국의 대공황이었다. 록펠러는 파산한 철도회사들을 사들여 직접 석유를 운송했다. 록펠러는 대공황을 이용해 전세계의 등유물량을 생산하게 되었다. 당시 록펠러가 미국의 98%에 가까운 등유를 통제했다고 한다. 그의 당시 순자산은 현재 가치로 250조원에 달했다. 


록펠러는 승승장구했다. 대공황 후에 철강으로 큰 부를 축적한 철강왕 카네기의 몇 배에 달하는 자산을 가졌을 정도였다. 록펠러는 이윤을 다른 사업에도 투자했다. 덕분에 스탠더드 오일 사의 자회사는 산림, 광산, 철도, 은행 등 분야가 매우 다양했다. 1882년에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의 계열사들을 모두 통합하여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설립했다. 하지만 1890년에 오하이오 주에서 셔먼법 위반을 이유로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해산시켰다. 셔먼법은 미국 최초의 독점 금지법으로, 주간 및 국제간 거래를 제한할 수 있는 생산 주체 간 어떤 형태의 연합도 불법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는 독점을 방지하기 위한 미국 최초의 법이었다. 이에 록펠러는 원래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의 본사가 있던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뉴저지로 사업의 거점을 옮겼다. 뉴저지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 전역에 있는 스탠더드 오일 자회사의 지주회사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1년 미국의 반트러스트법이 시행되면서,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는 법 위반으로 결국 해체되었다. 스탠더드 오일은 이후 저지 스탠더드 오일, 캘리포니아 스탠더드 오일, 뉴욕 스탠더드 오일 등의 독립회사로 쪼개졌는데, 이 회사 중, 저지 스탠더드 오일과 뉴욕 스탠더드 오일이 합병해서 엑슨모빌이 되었다. 록펠러는 성공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냉혹한 사람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스탠더드 오일에 해체된 후, 록펠러는 자선가로 변신했다. 스탠더드 오일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형 다국적 기업 중 하나다. 비록 해체되기는 했지만,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의 근대 경제에서 빠질 수 없는 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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