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 페라리가 있다면 독일에는 포르쉐가 있다고 할 정도로, 슈퍼카 라인에서 포르쉐는 엄청난 명성을 가지고 있다. 남자들의 로망이기도 한 포르쉐 스포츠카는 람보르기니, 페라리와 함께 세계 3대 스포츠카이다. 독일에서는 포어셔로 부르고, 미국에서는 폴시, 영국에서는 폴셰라고 발음하는 포르쉐에 대해서 지금부터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포르쉐의 설립자는 오스트리아의 자동차 설계사였던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이다. 포르쉐는 오스트리아 마퍼스토르프에서 태어나,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빈에서 전기자동차의 설계 및 제조에 성공했다. 그는 여러 유명 자동차회사에서 일하다가 1930년에 독립했다. 그는 1931년에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Dr. Ing. h. c. F. Porsche GmbH’라는 이름의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회사 설립 초기에는 자신의 이름을 건 자동차를 제작하지는 않았으며, 대신 주로 중형자동차 개발과 자문업무를 수행했다. 1936년에 히틀러에게 의뢰받은 보급형 차량의 시제품을 공개했다. 히틀러는 이 차를 KDF(Kraft durch Freude)라고 불렀는데, 이 뜻은 '기쁨의 힘'이었다. 하지만 포르쉐는 자신이 개발한 보급형 차량에 국민차라는 뜻의 '폭스바겐(Volkswage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미국에 출시된 폭스바겐 차량은 외관이 딱정벌레와 비슷하다고 하여 '비틀(Beetle)'이라고 불렸다. 비틀은 현재까지 2,100만 대 이상이 판매되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 best 10'에 이름을 올렸다. 1939년에 비틀의 여러 부품을 활용해 포르쉐 자신의 이름을 붙인 포르쉐 64가 처음으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레이스에 출전시키지는 못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전쟁 기간 동안 전투용 장갑차인 쿠벨바겐(Kubelwagen)과 슈빔바겐(Schwimmwagen)을 생산했다. 이 때문에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2차대전이 끝난 이후, 전범으로 체포되어 4년간 복역했다. 복역 중 병을 얻은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1951년에 사망하고, 그의 사업은 아들인 페리 포르쉐(Ferry Porsche)가 이어받았다.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복역을 마치고 죽기 진전에 개발한 마지막 차량이 바로 1949년에 만들어진 포르쉐 356이었다. 이 차량은 '점프하는 개구리'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이후 포르쉐에서 나오는 차량들에 전부 '개구리'라는 별명이 붙는다고 한다. 개구리라는 별명은 포르쉐 차량의 대부분이 후드에 둥근 라이트가 튀어나오듯이 디자인 되어있기 때문이다. 여하간 포르쉐 356은 출시 이후 17년간 약 7만 대가 넘게 판매되었다. 이후 포르쉐는 보급형 제품인 포르쉐 914와 924, 최고급 모델 928, 중저가 모델 944, 968 등 다양한 스포츠카를 제작했다. 이후 1963년에는 포르쉐 356의 후속 모델인 포르쉐 911이 출시되었다. 이 제품은 포르쉐하면 떠오르는 포르쉐의 주력제품이자 최고 인기 모델이다. 일반 슈퍼카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데는 무리가 있는 반면, 포르쉐 911은 왠만한 배기가스 규제를 모두 만족시키고, 과속방지턱 등의 다양한 요철지역을 무난하게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일상 사용이 가능한 슈퍼카이다. 심지어 승차감 또한 스포츠카 치고는 매우 편안하고, 내구성 또한 매우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드림카로 불린다. 그 외에도 매운 고추라는 뜻의 '포르쉐 카이옌' 또한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포르쉐 카이옌은 포르쉐가 처음으로 생산한 고성능 중형 SUV인데, 역대 포르쉐 자동차 누적 판매량 중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출시 초기에는 여러 평론가들에게 최악의 평을 받았던 카이옌이었지만, 뛰어난 성능과 포르쉐 네임 밸류 덕분에 소비자들에게 큰 주목을 받았다. 카이엔 시리즈의 여러 모델 중, 카이엔 터보는 제로백 4초 대에 최고속력 300km/h를 기록하는 만큼, 성능면에서는 거의 스포츠카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덕분에 포르쉐의 기존 스포츠카 제품들보다 높은 판매고를 올려, 포르쉐 사의 최고 효자 제품이 되었다.


포르쉐는 여러 슈퍼카 브랜드 중, 유일하게 자동차를 수작업이 아닌 기계생산으로 양산할 수 있는 기업이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익률을 내는 자동차회사이기도 하다. 현재 포르쉐는 고성능 스포츠카, 슈퍼카, 세단, SUV 등을 제조하며, 아우디, 폭스바겐, 벤틀리, 부가티, 람보르기니 등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폭스바겐그룹에 속해 있다. 주요 모델로는 포르쉐 911, 케이맨(Cayman), 파나메라(Panamera), 카이엔(Cayenne)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918스파이더(918 Spyder), 마칸(Macan), 박스터 등을 판매하고 있다.




BMW는 독일의 자동차 브랜드로, 세단, 컨버터블, SUV, 스포츠카, 모터사이클 등을 제조한다. 하지만 BMW의 모태 산업은 자동차가 아니었다. 지금부터 BMW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BMW는 1913년 칼 프리드리히 라프가 독일 뮌헨에 설립한 '라프 모토렌 베르케(Rapp Motor Works)'라는 항공기 엔진 제조업체가 그 시작이다. 라프 모토렌 베르케는 독일 공군에 엔진을 납품했지만, 1916년에 경영 위기를 맞게 된다. 이에 오스트리아 태생의 프란츠 오세프 포프와 독일 태생의 막스 프리츠가 라프 모토렌 베르케를 인수하여 회사 명칭을 '바이에리셰 모토렌 베르케(Bavarian Motor Works)'로 변경했다. 이때부터 바이에레셰 모토렌 베르케는 'BMW'라는 약자로 부르게 되었다. 1918년 주식회사로 상장된 바이에레셰 모토렌 베르케는 독일 군대에 계속 비행기 엔진을 납품했다. 하지만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에서 패배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더 이상 비행기를 생산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바이에레셰 모토렌 베르케는 사업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항공기 엔진에서 모터사이클로 사업을 전환한 바이에레셰 모토렌 베르케는 1923년 첫 모델을 판매했다. 전쟁 패배 이후 독일의 경제는 매우 어려워졌고, 이에 자동차보다는 모터사이클에 대한 수요가 더 높았다. 게다가 바이에레셰 모토렌 베르케의 제품은 항공기 엔진 기술을 토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큰 인기를 끌었다. 

1928년에 BMW는 프란츠 요세프 포프의 주도 아래, 자동차 산업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BMW는 비행기공장이었던 아이제나흐를 인수해서 자동차 공장으로 재탄생시켰다. 영국의 자동차업체인 오스틴에서 소형 자동차 모델인 Austin 7의 제작권 및 판매권을 사들인 BMW는 1929년, 그를 기반으로 소형자동차 모델을 출시한다. BMW의 첫 자동차모델인 딕시는 그 이후 후속모델 딕시 디에이 투부터 디에이 포까지 연달아 출시되었다. 1933년 BMW는 BMW303을 출시했다. BMW303은 6기통 엔진이 장착되었으며 프로펠러 엠블럼과 키드니 그릴이 처음 적용된 제품이었다. 이후 프로펠러 엠블럼과 키드니 그릴은 BMW의 상징이 되었다. BMW는 1926년, 경쟁업체였던 다임러 벤츠와의 합병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무산되었다. BMW는 항공기를 모티브로 한 2인승 레이싱카 BMW328을 1936년에 출시했다. 이 제품은 강철 프레임, 전방 독립식 서스펜스 등을 장착해 당시 좋은 평가를 받았다. BMW328은 출시되고 4년간 172개의 경주에서 141 차례 우승을 거두는 쾌거를 이루어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제 2차대전동안 독일 공군에 항공기 엔진과 로켓을 제작해주었던 BMW는 연합국에게서 3년 동안 생산 금지 명령을 받게 된다. 

1950년대에 들어서야 BMW는 다시 자동차 제작을 재기했다. 1952년 럭셔리 세단 두 모델을 출시했으나 전쟁 이후 경제상황이 좋지 못했던 독일 국민들에게서는 외면받았다. 그 이후 BMW는 미국 스포츠카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 당시 미국 스포츠카 시장을 선점하고 있었던 회사는 다임러 벤츠였다. 자동차 역사상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받는 다임러 벤츠의 '300SL'모델에 맞서 BMW가 출시한 제품은 BMW503과 BMW507이었다. 이 중, BMW507은 최고 출력 150마력에 최고속도 227km/h의 최고급 모델이었다. 많은 유명인들이 BMW507을 구입했지만 대중들에게는 너무 비싼 가격때문에 외면당했다. 계속되는 재정난을 타계하기 위해 BMW는 보급형 콤팩트 차량을 제작하기로 한다. BMW700은 세단, 쿠페, 컨버터블 총 3종류로 출시된 보급형 차량으로써 후방 엔진 구조가 특징이었다. 출시 전부터 화제를 모은 BMW700은 1965년까지 총 18만대가 넘게 판매되었다. BMW700이 선전하기는 했지만 1959년 BMW는 파산위기에 직면한다. 이에 BMW는 다시 한 번 다임러 벤츠와의 합병을 추진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BMW의 로고를 계속 유지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주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독일 사업가 헤르베르트 콴트가 BMW의 주식을 모두 사들여 BMW는 독립회사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대주주가 된 헤르베르트 콴트는 BMW의 매출 촉진을 위해 다임러 벤츠에 있던 파울 한네만을 영입한다. 파울 한네만은 BMW의 판매이사가 되어 BMW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된다. 1961년 프랑크푸르트 오토쇼에서 많은 호응을 얻은 BMW1500의 잠재력을 인식한 헤르베르트 콴트는 그 해 BMW 뉴 클래스 시리즈의 첫 모델로 BMW1500을 선택한다. 여기서 뉴클래스의 의미는 전쟁 이후 BMW가 생산하지 않았던 준준형 엔진 차량을 의미했다. 파울 한네만은 BMW1500의 가격을 포드(Ford)나 오펠(Opel) 등의 경쟁업체의 차량보다 훨씬 높게 책정했다. 하지만 BMW1500이 제공하는 스포츠형 이미지와 혁신적인 디자인, 품질의 결합 등에 대해 고객들의 인정을 얻었다. 특히 BMW1500의 후속모델인 BMW1800은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에 BMW는 프리미엄 라인과 저가 모델을 연이어 출시하고 계속 많은 사랑을 받았다. 덕분에 BMW는 재정난을 타계하고 스포츠 세단 브랜드라는 인식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1970년에는 에버하르트 본 쿠엔하임이 새로운 CEO로 취임했다. 그는 BMW의 차량을 전부 시리즈 단위로 재정비했다. 1974년 석유파동이 일어나 엔진 효율성에 대한 고객들의 니즈가 크게 증가하였다. 이에 BMW는 콤팩트 차량인 3시리즈를 선보였고, 큰 성과를 거둔다. BMW는 경쟁업체인 다임러 벤츠의 벤츠S클래스의 대항마로 BMW7시리즈를 1977년 출시했다. 이는 BMW의 첫번째 대형 라인으로, 최신기술이 모두 접목된 고급형이었다. 1986년까지 BMW7시리즈는 약 28만대 이상의 높은 판매율을 보였다. BMW는 이후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북미, 스위스 등 여러 나라에서 판매를 개시해 크게 성장했다. BMW의 생산량은 해외 진출 이후 4배 가량 급증했고, 매출액 또한 20배 가량 상승했다. 1990년대 초반 미국의 경제불황과 걸프전쟁으로 인해 BMW를 포함한 대부분의 자동차 시장이 큰 타격을 입었다. 1994년에 BMW는 새로 취임한 CEO 베르트 피세츠리더의 지휘 아래 영국의 자동차업체인 로버그룹을 인수했다. 1998년에는 롤스로이스를 인수하기도 했다. 기업 확장을 노렸던 BMW는 불경기로 인해 로버그룹을 운영하기 어려웠고, 이에 더불에 일본자동차 시장의 성장세가 급등하는 바람에 경영난에 봉착하게 된다. 결국 2000년에 BMW는 로버 그룹 중 미니(MINI)를 제외하고 랜드로버는 포드 모터 컴퍼니에, 나머지 로버는 피닉스 컨소시엄에 매각했다. 따라서 현재 BMW는 부속 브랜드로 롤스로이스와 BMW미니 만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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