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 페라리가 있다면 독일에는 포르쉐가 있다고 할 정도로, 슈퍼카 라인에서 포르쉐는 엄청난 명성을 가지고 있다. 남자들의 로망이기도 한 포르쉐 스포츠카는 람보르기니, 페라리와 함께 세계 3대 스포츠카이다. 독일에서는 포어셔로 부르고, 미국에서는 폴시, 영국에서는 폴셰라고 발음하는 포르쉐에 대해서 지금부터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포르쉐의 설립자는 오스트리아의 자동차 설계사였던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이다. 포르쉐는 오스트리아 마퍼스토르프에서 태어나,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빈에서 전기자동차의 설계 및 제조에 성공했다. 그는 여러 유명 자동차회사에서 일하다가 1930년에 독립했다. 그는 1931년에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Dr. Ing. h. c. F. Porsche GmbH’라는 이름의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회사 설립 초기에는 자신의 이름을 건 자동차를 제작하지는 않았으며, 대신 주로 중형자동차 개발과 자문업무를 수행했다. 1936년에 히틀러에게 의뢰받은 보급형 차량의 시제품을 공개했다. 히틀러는 이 차를 KDF(Kraft durch Freude)라고 불렀는데, 이 뜻은 '기쁨의 힘'이었다. 하지만 포르쉐는 자신이 개발한 보급형 차량에 국민차라는 뜻의 '폭스바겐(Volkswage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미국에 출시된 폭스바겐 차량은 외관이 딱정벌레와 비슷하다고 하여 '비틀(Beetle)'이라고 불렸다. 비틀은 현재까지 2,100만 대 이상이 판매되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 best 10'에 이름을 올렸다. 1939년에 비틀의 여러 부품을 활용해 포르쉐 자신의 이름을 붙인 포르쉐 64가 처음으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레이스에 출전시키지는 못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전쟁 기간 동안 전투용 장갑차인 쿠벨바겐(Kubelwagen)과 슈빔바겐(Schwimmwagen)을 생산했다. 이 때문에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2차대전이 끝난 이후, 전범으로 체포되어 4년간 복역했다. 복역 중 병을 얻은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1951년에 사망하고, 그의 사업은 아들인 페리 포르쉐(Ferry Porsche)가 이어받았다.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복역을 마치고 죽기 진전에 개발한 마지막 차량이 바로 1949년에 만들어진 포르쉐 356이었다. 이 차량은 '점프하는 개구리'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이후 포르쉐에서 나오는 차량들에 전부 '개구리'라는 별명이 붙는다고 한다. 개구리라는 별명은 포르쉐 차량의 대부분이 후드에 둥근 라이트가 튀어나오듯이 디자인 되어있기 때문이다. 여하간 포르쉐 356은 출시 이후 17년간 약 7만 대가 넘게 판매되었다. 이후 포르쉐는 보급형 제품인 포르쉐 914와 924, 최고급 모델 928, 중저가 모델 944, 968 등 다양한 스포츠카를 제작했다. 이후 1963년에는 포르쉐 356의 후속 모델인 포르쉐 911이 출시되었다. 이 제품은 포르쉐하면 떠오르는 포르쉐의 주력제품이자 최고 인기 모델이다. 일반 슈퍼카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데는 무리가 있는 반면, 포르쉐 911은 왠만한 배기가스 규제를 모두 만족시키고, 과속방지턱 등의 다양한 요철지역을 무난하게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일상 사용이 가능한 슈퍼카이다. 심지어 승차감 또한 스포츠카 치고는 매우 편안하고, 내구성 또한 매우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드림카로 불린다. 그 외에도 매운 고추라는 뜻의 '포르쉐 카이옌' 또한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포르쉐 카이옌은 포르쉐가 처음으로 생산한 고성능 중형 SUV인데, 역대 포르쉐 자동차 누적 판매량 중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출시 초기에는 여러 평론가들에게 최악의 평을 받았던 카이옌이었지만, 뛰어난 성능과 포르쉐 네임 밸류 덕분에 소비자들에게 큰 주목을 받았다. 카이엔 시리즈의 여러 모델 중, 카이엔 터보는 제로백 4초 대에 최고속력 300km/h를 기록하는 만큼, 성능면에서는 거의 스포츠카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덕분에 포르쉐의 기존 스포츠카 제품들보다 높은 판매고를 올려, 포르쉐 사의 최고 효자 제품이 되었다.


포르쉐는 여러 슈퍼카 브랜드 중, 유일하게 자동차를 수작업이 아닌 기계생산으로 양산할 수 있는 기업이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익률을 내는 자동차회사이기도 하다. 현재 포르쉐는 고성능 스포츠카, 슈퍼카, 세단, SUV 등을 제조하며, 아우디, 폭스바겐, 벤틀리, 부가티, 람보르기니 등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폭스바겐그룹에 속해 있다. 주요 모델로는 포르쉐 911, 케이맨(Cayman), 파나메라(Panamera), 카이엔(Cayenne)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918스파이더(918 Spyder), 마칸(Macan), 박스터 등을 판매하고 있다.




'스포츠카' 하면 생각나는 5대 브랜드는 람보르기니, 맥라렌, 부가티, 페라리, 포르쉐이다. 물론 사람마다 5대 스포츠카에 다른 회사를 넣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저 5개의 회사가 유명 스포츠카 전문 회사이다. 좀 더 세분화하자면 3대 스포츠카 브랜드로 람보르기니, 포르쉐, 페라리가 있다. 이 중, 페라리는 유명 레이서였던 이탈리아의 엔초 페라리가 설립한 브랜드이다. 최고의 레이싱 팀이자 자동차 제조회사인 페라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페라리는 1929년 엔초 페라리(Enzo Ferrari)가 이탈리아 마라넬로에 설립했다. 엔초 페라리는 1929년에 포뮬러원 경주팀인 '스쿠데리아 페라리(Scuderia Ferrari)'를 만들었는데, 페라리 회사가 여기서 출발했다고 보면 된다.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본래 아마추어 레이서들에게 알파 로메오의 차량을 스폰서 해주던 단체의 이름이었다. 엔초 페라리는 알파 로메오와 갈등이 생겼고, 결국 1939년 알파 로메오를 나와서 모데나에 Auto Avio Costruzioni Ferrari를 설립했다. 그는 알파 로메오보다 좋은 F1 자동차를 만들기로 다짐한다. 페라리는 자신의 첫 자동차인 티포 815를 출시했는데, 알파 로메오를 나오면서 4년간 자동차에 페라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도록 계약했기 때문에 815에는 페라리라는 이름이 들어가지 못했다. 티포 815는 주요 레이스에서 6번이나 우승하는 쾌거를 이뤘다. 하지만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이 2차대전에 참가하면서 이탈리아의 자동차 경주가 중단되었다. 때문에 모데나에 있던 페라리 공장 또한 전쟁에 필요한 항공기 엔진 부속품 등을 생산해야 했다. 하지만 덕분에 페라리는 큰 돈을 벌었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나고, 자동차 생산이 재개되었다. 마침 알파 로메오와 계약했던 4년도 끝났기 때문에, 엔초 페라리는 1947년 '페라리(Ferrari S.p.A)'라는 법인 이름으로 차량을 처음 생산했다. 최초모델은 12기통 엔진을 장착한 페라리 125 스포츠였다. 페라리 125 스포츠와 후속모델이었던 페라리 166은 포뮬러원을 비롯한 자동차 경주대회에 계속 참가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페라리는 계속해서 성능이 좋은 스포츠카를 양산했고, 결국 1951년에 세계 최고였던 알파 로메오의 레이싱 팀을 누르고 우승하게 되었다. 페라리는 포뮬라원에 출전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레이싱팀 스쿠데리아 페라리와 그 팀을 지원한 페라리는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경주팀과 후원사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인기를 누린 덕분에 부작용도 생겼다. 그랑프리에서 계속해서 우승한 페라리의 슈퍼카를 사고 싶어하는 고객들이 늘어나면서 페라리의 자체 공장에서의 공급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에 페라리는 1969년, 이탈리아의 자동차 제조업체인 피아트(Fiat)사에 지분 50%를 넘기며 산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피아트는 현재 세계에서 6번째로 큰 자동차 기업이다. 페라리는 피아트 산하로 들어간 이후, 1970년대를 맞이했다. 당시에는 슈퍼카 경쟁이 본격화되어 전세계의 여러 자동차업체들이 슈퍼카를 만들어냈다. 페라리도 이에 동참해 1984년에 페라리 288GTO를 출시했다. 최대 출력이 400마력에 달했던 이 제품은 경기 중의 사고로 인해 선수와 관중이 사망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엔초 페라리는 이후 1987년에 288GTO의 후속모델인 페라리 F40을 출시했다. 이 제품은 2인승 스포츠카로 엔초 페라리가 마지막으로 개발한 모델이다. 후륜구동 방식을 채택한 F40은 페라리의 최고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엔초 페라리는 1988년에 사망했고, 뒤를 이어 루카 디 몬테제몰로가 CEO가 되었다. 그 이후 페라리는 90%의 지분을 피아트에 넘겼다. 현재 피아트의 계열사가 된 페라리는 별도의 법인으로 운영되고 있다. 

페라리의 자동차하면 생각나는 컬러는 바로 레드이다. 이탈리아 어로 로쏘 코르사(Race Red)라 불리는 이 컬러는 페라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로쏘 코르사는 이탈리아의 상징 색으로 여겨지는 컬러이기도 하다. 이 컬러가 페라리의 상징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1920년대 레이싱 경주에서 각 브랜드별로 출신국가를 알게 하기 위해 레이싱카의 색상을 통일했기 때문이다. 이후 한 국가에서 여러 브랜드가 레이싱카를 제작했기 때문에 이러한 규정은 사라졌다. 대부분 메인 스폰서의 상징색을 레이싱카에 도색하게 되었는데, 페라리만은 로쏘 코르사를 고집했다. 덕분에 로쏘 코르사는 페라리의 경주차 외에 일반 양산차에도 많이 쓰이고 있다. 

역대 유명한 페라리 자동차 모델로 F40, 엔초, 360모데나 등이 있다. 이 중, 엔초는 설립자인 엔초 페라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제품이다. 엔초는 페라리 창립 60주년 기념모델로 F60으로 불리기도 한다. 페라리의 최고 작품으로 불리는 F40를 이을 작품으로 인정받는 엔초는 성능과 디자인이 매우 뛰어나다. 이후 모델에는 F12베를리네타, FF, 458스파이더, 458이탈리아, 458스페치알레, 캘리포니아T 등이 있다. 이 중, F12베를리네타는 12기통 모델이고, FF는 페라리 최초의 4륜구동 승용차 모델이다. 458스페치알레는 페라리의 터보차저 V8엔진을 장착한 스포츠카 중 성능이 제일 우수하며, 캘리포니아T는 외관이 우아하고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모델이다. 현재 페라리는 브랜드 가치와 희소성을 위해 연간 7,000대 이하의 자동차만 생산하고 있다.


BMW는 독일의 자동차 브랜드로, 세단, 컨버터블, SUV, 스포츠카, 모터사이클 등을 제조한다. 하지만 BMW의 모태 산업은 자동차가 아니었다. 지금부터 BMW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BMW는 1913년 칼 프리드리히 라프가 독일 뮌헨에 설립한 '라프 모토렌 베르케(Rapp Motor Works)'라는 항공기 엔진 제조업체가 그 시작이다. 라프 모토렌 베르케는 독일 공군에 엔진을 납품했지만, 1916년에 경영 위기를 맞게 된다. 이에 오스트리아 태생의 프란츠 오세프 포프와 독일 태생의 막스 프리츠가 라프 모토렌 베르케를 인수하여 회사 명칭을 '바이에리셰 모토렌 베르케(Bavarian Motor Works)'로 변경했다. 이때부터 바이에레셰 모토렌 베르케는 'BMW'라는 약자로 부르게 되었다. 1918년 주식회사로 상장된 바이에레셰 모토렌 베르케는 독일 군대에 계속 비행기 엔진을 납품했다. 하지만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에서 패배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더 이상 비행기를 생산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바이에레셰 모토렌 베르케는 사업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항공기 엔진에서 모터사이클로 사업을 전환한 바이에레셰 모토렌 베르케는 1923년 첫 모델을 판매했다. 전쟁 패배 이후 독일의 경제는 매우 어려워졌고, 이에 자동차보다는 모터사이클에 대한 수요가 더 높았다. 게다가 바이에레셰 모토렌 베르케의 제품은 항공기 엔진 기술을 토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큰 인기를 끌었다. 

1928년에 BMW는 프란츠 요세프 포프의 주도 아래, 자동차 산업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BMW는 비행기공장이었던 아이제나흐를 인수해서 자동차 공장으로 재탄생시켰다. 영국의 자동차업체인 오스틴에서 소형 자동차 모델인 Austin 7의 제작권 및 판매권을 사들인 BMW는 1929년, 그를 기반으로 소형자동차 모델을 출시한다. BMW의 첫 자동차모델인 딕시는 그 이후 후속모델 딕시 디에이 투부터 디에이 포까지 연달아 출시되었다. 1933년 BMW는 BMW303을 출시했다. BMW303은 6기통 엔진이 장착되었으며 프로펠러 엠블럼과 키드니 그릴이 처음 적용된 제품이었다. 이후 프로펠러 엠블럼과 키드니 그릴은 BMW의 상징이 되었다. BMW는 1926년, 경쟁업체였던 다임러 벤츠와의 합병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무산되었다. BMW는 항공기를 모티브로 한 2인승 레이싱카 BMW328을 1936년에 출시했다. 이 제품은 강철 프레임, 전방 독립식 서스펜스 등을 장착해 당시 좋은 평가를 받았다. BMW328은 출시되고 4년간 172개의 경주에서 141 차례 우승을 거두는 쾌거를 이루어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제 2차대전동안 독일 공군에 항공기 엔진과 로켓을 제작해주었던 BMW는 연합국에게서 3년 동안 생산 금지 명령을 받게 된다. 

1950년대에 들어서야 BMW는 다시 자동차 제작을 재기했다. 1952년 럭셔리 세단 두 모델을 출시했으나 전쟁 이후 경제상황이 좋지 못했던 독일 국민들에게서는 외면받았다. 그 이후 BMW는 미국 스포츠카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 당시 미국 스포츠카 시장을 선점하고 있었던 회사는 다임러 벤츠였다. 자동차 역사상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받는 다임러 벤츠의 '300SL'모델에 맞서 BMW가 출시한 제품은 BMW503과 BMW507이었다. 이 중, BMW507은 최고 출력 150마력에 최고속도 227km/h의 최고급 모델이었다. 많은 유명인들이 BMW507을 구입했지만 대중들에게는 너무 비싼 가격때문에 외면당했다. 계속되는 재정난을 타계하기 위해 BMW는 보급형 콤팩트 차량을 제작하기로 한다. BMW700은 세단, 쿠페, 컨버터블 총 3종류로 출시된 보급형 차량으로써 후방 엔진 구조가 특징이었다. 출시 전부터 화제를 모은 BMW700은 1965년까지 총 18만대가 넘게 판매되었다. BMW700이 선전하기는 했지만 1959년 BMW는 파산위기에 직면한다. 이에 BMW는 다시 한 번 다임러 벤츠와의 합병을 추진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BMW의 로고를 계속 유지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주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독일 사업가 헤르베르트 콴트가 BMW의 주식을 모두 사들여 BMW는 독립회사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대주주가 된 헤르베르트 콴트는 BMW의 매출 촉진을 위해 다임러 벤츠에 있던 파울 한네만을 영입한다. 파울 한네만은 BMW의 판매이사가 되어 BMW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된다. 1961년 프랑크푸르트 오토쇼에서 많은 호응을 얻은 BMW1500의 잠재력을 인식한 헤르베르트 콴트는 그 해 BMW 뉴 클래스 시리즈의 첫 모델로 BMW1500을 선택한다. 여기서 뉴클래스의 의미는 전쟁 이후 BMW가 생산하지 않았던 준준형 엔진 차량을 의미했다. 파울 한네만은 BMW1500의 가격을 포드(Ford)나 오펠(Opel) 등의 경쟁업체의 차량보다 훨씬 높게 책정했다. 하지만 BMW1500이 제공하는 스포츠형 이미지와 혁신적인 디자인, 품질의 결합 등에 대해 고객들의 인정을 얻었다. 특히 BMW1500의 후속모델인 BMW1800은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에 BMW는 프리미엄 라인과 저가 모델을 연이어 출시하고 계속 많은 사랑을 받았다. 덕분에 BMW는 재정난을 타계하고 스포츠 세단 브랜드라는 인식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1970년에는 에버하르트 본 쿠엔하임이 새로운 CEO로 취임했다. 그는 BMW의 차량을 전부 시리즈 단위로 재정비했다. 1974년 석유파동이 일어나 엔진 효율성에 대한 고객들의 니즈가 크게 증가하였다. 이에 BMW는 콤팩트 차량인 3시리즈를 선보였고, 큰 성과를 거둔다. BMW는 경쟁업체인 다임러 벤츠의 벤츠S클래스의 대항마로 BMW7시리즈를 1977년 출시했다. 이는 BMW의 첫번째 대형 라인으로, 최신기술이 모두 접목된 고급형이었다. 1986년까지 BMW7시리즈는 약 28만대 이상의 높은 판매율을 보였다. BMW는 이후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북미, 스위스 등 여러 나라에서 판매를 개시해 크게 성장했다. BMW의 생산량은 해외 진출 이후 4배 가량 급증했고, 매출액 또한 20배 가량 상승했다. 1990년대 초반 미국의 경제불황과 걸프전쟁으로 인해 BMW를 포함한 대부분의 자동차 시장이 큰 타격을 입었다. 1994년에 BMW는 새로 취임한 CEO 베르트 피세츠리더의 지휘 아래 영국의 자동차업체인 로버그룹을 인수했다. 1998년에는 롤스로이스를 인수하기도 했다. 기업 확장을 노렸던 BMW는 불경기로 인해 로버그룹을 운영하기 어려웠고, 이에 더불에 일본자동차 시장의 성장세가 급등하는 바람에 경영난에 봉착하게 된다. 결국 2000년에 BMW는 로버 그룹 중 미니(MINI)를 제외하고 랜드로버는 포드 모터 컴퍼니에, 나머지 로버는 피닉스 컨소시엄에 매각했다. 따라서 현재 BMW는 부속 브랜드로 롤스로이스와 BMW미니 만을 두고 있다.

럭셔리 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의 대표 격인 메르세데스 벤츠는 세단, 컨버터블, 스포츠카, 쿠페 등을 제조하는 독일의 회사이다. 메르세데스 벤츠의 이름은 스페인어로 '우아함'을 뜻하는 메르세데스에서 따왔다. 세계 최초의 디젤 자동차를 개발한 메르세데스 벤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메르세데스 벤츠의 첫번째 기원은 1883년 칼 벤츠가 설립한 벤츠 앤 시에라는 세계 최초의 자동차 공장이다. 칼 벤츠는 최초의 휘발유엔진을 1879년 개발하고, 1883년 10월 독일 만하임에 공장을 설립했다. 1886년에 벤츠는 최초의 삼륜자동차를 개발했다. 이 자동차는 세계 최초로 '자동차'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획득했고, 특허를 받은 자동차라는 의미의 '페이턴트 모터바겐'이라 이름 지어졌다. 벤츠 엔 시에는 1900년까지 매년 600대의 자동차를 생산했는데, 이 중에는 앞바퀴를 여러 각도로 움직일 수 있는 빅토리아도 포함되어 있다. 메르세데스 벤츠의 또다른 기원은 '다임러-모튼-게샬프트'이다. 이 회사는 줄여서 DMG라고 한다. DMG는 1902년에 경량차 메르세데스를 선보이는데, 메르세데스는 빠른 속도와 안전성을 지녀서 큰 인기를 얻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수년동안 경쟁관계였던 DMG와 벤츠 앤 시에가 연합하게 되었다. 두 회사는 디자인, 광고, 영업전략, 기술 등을 서로 협조하기로 하고 메르세데스-벤츠 AG를 설립하여 마케팅활동을 담당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MG와 벤츠 앤 시에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둘은 합병하여 다임러-벤츠AG가 된다. 이 다임러-벤츠 AG가 오늘날의 메르세데스-벤츠인 것이다. 

합병 이후 다임러 벤츠 AG는 최초의 모델을 선보였는데, 이 때 부터 모든 모델에 '메르세데스 벤츠'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한 엠블럼은 두 회사가 합병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 다임러 사의 세 꼭지 별을 벤츠의 월계관로고가 둘러싸는 디자인을 사용했다. 이 디자인이 모태가 되어 현재 원 안의 세꼭지 별 모양의 앰블럼이 탄생하게 된다. 

1928년, 메르세데스 벤츠는 메르세데스 SSK를 첫 생산했다. 250마력의 직력 6기통짜리 엔진과 4단 변속기를 장착한 이 모델은 시속 190km까지 낼 수 있는 성능을 지녔다. 그 다음해에는 2만km를 달리는 내내 한번도 고장이 나지 않을 정도의 뛰어난 내구성을 가진 뉘르부르크 모델을 선보였다. 메르세데스 벤츠는 이후 세계 최초로 디젤 엔진을 장착한 승용차를 개발했다. 이름을 '메르세데스 벤츠 260D'로 정한 디젤 자동차는 1936년부터 1940년까지 2000대 가량 생산되었다. 가솔린 엔진에 비해 무겁고 속도가 느린 대신, 연료비가 적게 들고 오래 달릴 수 있었기 때문에 택시 등에 주로 사용되었다. 1930년대의 메르세데스 벤츠는 디젤 자동차 외에도 '리무진' 차량에 주목했다. 국가 원수나 고위 공직자들을 대상으로 제작한 리무진은 독일의 빌헬름 2세나 독일 육군 원수였던 파울 폰 힌데부르크의 애정을 받았다. 제 2차 세계대전 때, 대부분의 독일 자동차 회사가 전쟁관련 물품을 생산했던 것처럼 벤츠 또한 군사장비나 비행기 모터 등을 생산했다. 1946년 종전 이후, 메르세데스 벤츠는 자동차 생산을 재게하였고, 그 다음 해에 '메르세데스 벤츠 300SL'을 출시했다. 자동차 역사 상, 불후의 명작으로 인정받는 메르세데스 벤츠 300SL은 경주용 자동차를 기본으로 제작되었으며, 6기통 2996cc의 215마력의 엔진을 장착했다. 최고속도가 무려 250km인 이 제품은 1954년부터 63년까지 3000대가 넘게 생산되었고, 뒤 이어 출시된 메르세데스 벤츠 190SL과 함께 현재의 메르세데스 벤츠 SL의 기원이 되었다. 1959년에는 BMW와의 합병이 추진되기도 했지만 무산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1960년대의 벤츠는 오늘날 메르세데스 벤츠의 상징이 된 라디에이터 그릴을 쓰기 시작했다. 또한 1970년대 부터 모델명에 엔진 배기량에 따른 숫자를 첨부했다. 메르세데스 벤츠 C클래스의 원조읜 190시리즈는 미국 시장을 겨냥하여 1982년에 발표되었는데, 초기에는 성과를 얻지 못했다. 후에 190시리즈에 6기통 엔진과 자동 변속기가 추가되었고, 그제서야 190시리즈는 인기를 얻었다. 190시리즈는 그동한 중대형 고급 차량에 집중하던 벤츠의 소형모델이었다. 190시리즈의 성공은 메르세데스 벤츠의 시장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2년, 메르세데스 벤츠는 베르너 니퍼 전 회장의 지휘 아래 S클래스를 출시했다. 하지만 다음 해, 매출 부진과 인건비 상승으로 벤츠는 변화를 생각하게 된다. 특히 적자였던 포커 사를 인수하며 약 11억 마르크에 가까운 손실을 입었기에, 변화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덕분에 메르세데스 벤츠는 여러 자동차 회사 중 가장 먼저 대중화된 자동차를 개발했고, 현지 생산을 시작했다. 199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선보였던 소형컨셉카인 '비전 A93'이 변화의 시작을 알렸다. 1997년에는 메르세데스 벤츠 A시리즈가 출시되어 대중화를 더욱 가속시켰다. 1998년에는 미국의 자동차회사인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을 인수하여 '다임러-클라이슬러'를 결성했다. 크라이슬러 인수 이후, 다임러-크라이슬러는 '마이바흐' 브랜드를 다시 부활시킨다. 마이바흐는 초호화 수제 자동차 브랜드로, 세계 3대 명차 중에 속하기도 한다. 2003년의 메르세데스 벤츠는 영국의 포뮬러 원 팀인 맥라렌과 함께 '메르세데스 벤츠 SLR 맥라렌' 스포츠카를 출시했다. 2007년 크라이슬러를 매각한 메르세데스 벤츠는 사명을 다임러 AG로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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