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산은 일본의 유명 자동차 회사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해서 연간 300대 이상의 자동차를 수출하고 있다. 일본 최초로 자동차를 만든 닛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닛산자동차의 모체는 1911년에 설립된 카이신샤 자동차공업이다. 카이신샤 자동차회사가 1931년 닛산재벌 산하로 들어간 뒤, 1932년에 일본의 첫 국산자동차인 닷산을 만들었다. 1933년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닛산자동차로 회사명을 변경했다. 

닛산재벌의 닛산은 일본어로 ‘일본산업을 줄인 말로, 아이카와 요시스케가 설립했다. 아이카와 요시스케는 이노우에 가오루의 외손자인데,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토 히로부미의 절친으로 유명하다. 그는 청일전쟁 기간동안 조선공사로 일한 경력도 있다. 부임해 있는 동안, 이노우에 가오루는 조선의 보호국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 외에도 이노우에 가오루의 조선에 대한 악행은 여러모로 악명이 높다. 

여하간 다시 닛산자동차 설명으로 돌아가자면, 닛산자동차는 현재 도요타, 혼다와 함께 일본 3대 자동차회사로 손꼽힌다. 특이하게도 일본의 다른 자동차 회사와는 달리, 닛산자동차는 프랑스의 르노사가 최대 주주이다. 전체 닛산자동차의 지분 중, 외국법인이 소유하고 있는 지분율이 74%가 넘는다. 현재 본사는 요코하마에 있으며,  도쿄 증권거래소 상장기업이다. 닛산이 만든 일본 제1호 대량생산 자동차인 닷산(Datsun)은 DAT자동차에서 만든 일본 최초의 국산차인 DAT을 본 따 만든 것이다. DAT자동차의 이름은 공동창업자인 덴 켄지로(Den Kenjiro)와 아오야마 로쿠로(Aoyama Rokuro), 타케우치 메이타로(Takeuchi Meitaro)의 이름 앞글자인 D,A,T를 따서 만든 것이다. DAT자동차는 주로 군용트럭을 만들다 1931년 소형차 닷선(Datsun)을 선보였다. 그 해 닛산그룹이 DAT자동차를 인수하고, 1932년에 새로운 자회사로 닛산자동차를 출범시켰다. 닛산자동차는 설립 초기에 미국의 자동차 기술을 전수받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대부분의 공장이 연합군에게 점령당하기도 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재기했다. 그 후 영국의 오스틴사와 제휴한 닛산은 오스틴의 기술을 바탕으로 한 자체 엔진을 개발했다. 닛산은 1959년에 블루버드를 내놓았고, 1950년대 후반에는 닷산과 소형 픽업트럭이 일본 국산차 중 처음으로 미국에 수출되었다. 블루버드와 닷산이 인기를 끌면서 닛산자동차는 일본 자동차업계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덕분에 닛산은 1959에 미국에 자회사를 설립했다. 그 후 세계시장으로 진출한 닛산은 꾸준한 기술개발을 통해 세계에서 인기를 끌었다. 닛산은 1970년대에 들어서는 세계 최대 자동차 수출업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73년 석유파동이 일어난 후, 전 세계적으로 소형차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다. 닛산은 이러한 흐름에 따라 소형차 생산을 늘렸고, 세계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닛산은 미국, 영국, 멕시코, 호주, 타이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 공장을 세웠다. 1985년까지 닛산은 수출용 차량에 전부 닷산 브랜드를 사용했지만, 그 후 부터는 닛산(Nissan) 브랜드를 사용했다. 1989년에는 미국에서 고급차 모델인 인피니티(Infiniti)를 출시했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는 경쟁업체였던 도요타가 성장하면서 닛산의 판매량이 감소했다. 닛산자동차는 연속되는 적자로 인해 재정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결국 1999년에 닛산은 프랑스 자동차회사인 르노 사와 전략적 협력관계를 맺었다. 르노 사는 닛산자동차의 지분 43.4%를 보유하고 닛산은 르노 지분 15%를 보유하는 협약이었다. 같은 해,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임명된 카를로스 곤(Carlos Ghosn)은 닛산회생계획(NRP)을 통한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덕분에 닛산자동차는 다시 부활할 수 있었고, 흑자경영을 이어갈 수 있었다. 부활한 닛산은 2006년에 파리모터쇼에서 디젤 SUV 캐시카이(Qashqai)를 공개했다. 닛산은 이후 지속적으로 새로운 기술개발에 투자했고, 특히 전기자동차 개발에 주력했다. 그 결과, 2009년에 닛산은 양산형 전기차 리프를 내놓았다. 

닛산자동차의 자회사로는 닛산포크리프트, 닛산마린, 오테크, 닛산상용차가 있다. 현재 미국, 영국, 캐나다, 멕시코, 인도 등의 나라에 현지 법인을 두고 있다. 닛산에서 판매하는 차종으로는 소형 큐브(Cube), 중형 알티마(Altima), 맥시마(Maxima), 무라노(Murano), 스포츠카 370Z, GT-R, 픽업트럭 프런티어(Frontier), 타이탄(Titan) 등이 있다. 닛산자동차는 2014년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이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 순위에서 61위를 차지했으며, 세계 6위 자동차회사에도 선정되었다. 현재는 자동차 부문 뿐만 아니라, 우주항공과 산업기계 부문에도 진출했다.

리복(Reebok)은 나이키, 아디다스 등과 같은 타 브랜드와는 달리 전 육상선수가 만든 스포츠 브랜드이다. 영국을 넘어 유럽 전역, 미국에서까지 사랑받은 리복은 2006년에 아디다스에 인수되었다. 리복의 모기업이 아디다스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현재 리복은 미국 회사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리복이 처음 시작된 곳이 영국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지금부터 이러한 리복에 대해 샅샅이 파헤쳐보기로 한다.



리복은 1895년 영국 런던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리복의 창시자는 조셉 윌리엄 포스터로, 그는 영국의 장거리 육상선수였다. 조셉의 할아버지인 사무엘 포스터는 영국 노팅햄샤이어에서 작은 신발가게를 운영했는데, 조셉은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조셉이 처음 개발한 운동화는 스파이크 러닝화였다. 사무엘 포스터가 개발한 스파이크가 달린 크리켓화를 본 조셉 윌리엄 포스터는 스파이크를 러닝화에 접목시키면 좀 더 접지력이 좋은 운동화가 탄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할아버지의 크리켓화를 경량화시켜 새로운 러닝화인 '포스터 러닝 펌프'를 만들어냈고, 이 운동화는 육상선수들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실제로 이 운동화는 그 당시에 있었던 다른 러닝화보다 접지력이 훨씬 우수했다. 포스터 러닝 펌프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나자 조셉 포스터는 1895년 'J.W.포스터 앤 선스'라는 러닝화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J.W.포스터 앤 선스는 러닝화 외에 다른 운동화에도 스파이크 기술을 접목시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1901년에 조셉 포스터는 발 사이즈를 측정할 수 있는 도표를 개발하여 선수들에게 맞춤형 운동화를 제작해주었다. 이러한 J.W.포스터 앤 선스의 운동화는 운동선수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그 당시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사용하는 신발로 자리를 잡게 된다. 여러 선수들 중 특히 J.W.포스터 앤 선스를 유명하게 만들어 준 건 바로 해롤드 아브라함과 에릭 린델이었다. 영화 '불의 전차'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두 선수는 스파이크 운동화를 신고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덕분에 J.W.포스터 앤 선스는 유럽시장에서 유명한 브랜드로 성장하게 된다. 

J.W.포스터 앤 선스는 그 후 1958년, 회사이름을 리복으로 변경한다. 리복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빠른 동물로 알려진 영양류의 이름을 땄으며, 가장 빠른 운동화를 생산한다는 이미지를 위한 시도였다. 리복은 1979년, 시카고 국제 박람회에서 북미 계약권을 판매함으로써 본격적인 미국 진출에 나섰다. 이 때, 리복의 북미계약권을 따낸 폴 파이어먼은 현재 리복의 본사가 있는 메사추세츠 주에 리복-USA를 만들었다. 리복이 미국에 진출했던 시기에 미국에서는 조깅 붐이 일어났다. 따라서 조깅화 또한 대유행이었으며, 이 때 출시된 리복의 러닝화는 타 브랜드보다 비싼 금액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렸다. 그 이유는 리복의 '러닝화 전문 브랜드'라는 이미지 덕분이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리복은 여성 전용 에어로빅화 제작에 집중한다. 미국 영화배우였던 제인 폰다가 에어로빅이라는 새로운 운동을 소개하자, 미국에서는 에어로빅 붐이 일어났다. 에어로빅의 특성 상, 무거운 운동화보다는 가벼운 운동화가 필요했고 리복은 이에 부합하는 운동화를 만들었다. 나이키나 아디다스 등 리복의 경쟁사들은 그 당시 여성들의 니즈를 무시했던 반면, 리복은 그에 대응하면서 큰 성과를 얻게 되었다. 덕분에 리복은 기존의 '러닝화'이미지를 탈피하고 여성용 운동화의 선두주자가 된다. 1987년, 마침내 리복은 나이키와 아디다스를 누르고 최고 매출을 달성해, 최정상급 브랜드로 성장했다. 

리복의 이러한 미국시장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리복-USA의 폴 파이어먼은 1984년에 영국 본사를 인수했다. 그 다음해 폴 파이어먼은 리복-USA의 이름을 리복-인터내셔널로 변경하고 뉴욕증권시장에 상장한다. 리복의 성장세는 멈추지 않았고, 1986년에는 더 락포트 컴퍼니를 인수해 사업영역을 더욱 확대했다. 1989년, 리복은 '스텝 리복'이라는 운동 프로그램을 개발해 미국 전역에서 시행했다. 이에 맞춰 리복은 운동화의 공기주입 방식인 펌프 기술을 개발했고, 펌프 기술이 적용된 에어로빅 운동화 등의 다양한 제품군이 출시되었다. 이 제품들이 큰 사랑을 받으면서 리복의 정상급 브랜드 이미지는 계속되었다. 리복은 이 흐름을 이어서 170여 국가에 다양한 제품들을 출시했고, 리복의 인기는 9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리복은 90년대에 들어서 영역 확대를 위해 새로운 제품군을 출시했다. 미식축구, 야구, 축구 등의 새로운 제품군은 리복의 인기를 더욱 높였다. 특히 NBA 스타였던 샤킬 오닐과 함께 출시한 '샤크 컬렉션'이 큰 사랑을 받았다. 리복은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90년대 후반에는 더욱 많은 스포츠스타와의 협업을 시도했다. 

2000년대에는 지금도 유행 중인 '코어단련운동'의 일종인 '리복 코어 트레이닝'프로그램을 시행했다. 또한 캐쥬얼시장으로도 영역을 확대해, 제이지나 50센트와 같은 힙합 아티스트와의 콜라보레이션을 시도했다. 하지만 90년대부터 에어로빅 붐이 사그라들면서 리복 또한 하락세를 걷게 되었다. 특히 경쟁사인 나이키의 선전으로 리복의 점유율은 크게 떨어졌고, 이에 반등을 노리기 위해 스타 마케팅을 과도하게 시도했던 리복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리복은 2006년 아디다스에 인수되면서 다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리복은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을 발굴하고 여성 소비자층의 외면하지 않았다는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회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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