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저그룹은 미국의 유명 제약회사이다.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를 발명한 회사로도 유명하다. 비아그라 덕분에 수컷 바다표범과 순록의 포획량을 감소시켰다는 연구결과도 있는데, 이는 파이저그룹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지구 생태계 보호에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파이저그룹은 '인류와 동물을 위한' 제약회사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지금부터 파이저그룹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파이저그룹은 독일계 미국인인 찰스 파이저(Charles Pfizer)와 찰스 에르하르트(Charles Erhart)가 세운 기업이다.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 온 찰스 파이저와 찰스 에르하르트는 사촌지간이었는데, 이 둘이 뉴욕 브루클린에 '찰스 파이저 앤드 컴퍼니(Charles Pfizer and Company)'를 설립했다. 1849년에 설립된 이 찰스 파이저 앤드 컴퍼니가 바로 파이저그룹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찰스 파이저는 독일에서 원래 약제사 수련생으로 있으면서 화학을 공부했다. 여기에 제빵 기술을 배운 찰스 에어하트가 더해져, 찰스 파이저 앤드 컴퍼니는 정제약품을 개발하게 되었다. 찰스 파이저 앤드 컴퍼니에서 처음 개발한 제품은 바로 쓴 맛이 나지 않는 구충제인 산토닌(santonin)이었다. 산토닌으로 성공을 거둔 파이저는 1862년에 타르타르 산과 타르타르 크림을 미국 최초로 생산했다. 파이저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기에 큰 역할을 한 것은 1880년에 개발된 구연산이었다. 파이저는 레몬과 라임의 수입농축액을 원료로 한 구연산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고, 이를 음료업체에 납품했다. 구연산은 파이저의 주요 생산품목이 되었으며, 파이저를 큰 성공으로 이끌었다.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은 페니실리움(Fenicillium)에 속하는 푸른곰팡이에서 얻은 화학물질이 박테리아로 발생한 병을 치료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플레밍은 이 화학물질을 페니실린(Penicillin)이라고 이름지었다. 하지만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당시에는 페니실린을 다량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 또한 페니실린이 몸에 흡수된 후, 쉽게 배설이 되버렸기 때문에 질병 치료에 이용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1941년에 파이저의 존 데이븐포트(John Davenport)와 고든 크레그월(Gorden Cragwall)이 페니실린 관련 심포지움에 참가했다. 이후 파이저는 3년 동안 회사의 모든 자원을 페니실린이 실제 치료에 사용될 수 있도록 만드는데 쏟아 붓는 모험을 했다. 당시 2차 세계대전으로 전 세계는 대량의 페니실린이 필요한 상태였다. 파이저는 페니실린을 효과적으로 치료에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고, 미국정부는 이러한 파이저의 기술을 이용한 항생제 생산을 허가했다. 여러 업체에서 파이저의 공정을 따라했지만, 파이저의 기술력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같이 투입된 페니실린의 90%는 파이저의 제품이었다. 이후에도 파이저의 페니실린은 전쟁 기간 내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파이저가 페니실린을 대량생산하면서 페니실린의 가격은 하락했다. 이에 파이저의 수익도 감소할 수 밖에 없었다.


파이저는 1950년대에 들어서기 전까지 자사 제품의 원료를 다른 회사에 대량으로 판매하는 화학약품 제조업체였다. 하지만 1940년대 후반에 새로운 항생물질을 발견하면서 파이저의 자체 브랜드가 개발되었다. '테라마이신(Terramycin)'이라는 약품은 광범위 항생제로, 파이저의 독자적인 첫 약품이었다. 이때부터 파이저는 제약회사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후 파이저는 계속해서 항생제를 개발했는데, 테트라신(Tetracyn)이나 비브라마이신(Vibramycin) 등 이었다. 1959년에는 동물의약품 개발에도 진출했다. 파이저가 1980년에 출시한 소염진통제 펠덴(Feldene)은 관절염, 골격질환, 통풍 등에 특효가 있었는데, 이 제품은 파이저의 약품 중 최초로 10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1992년에는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처방받는 고혈압 치료제인 노바스크(Norvasc)를 출시하기도 했다. 파이저는 그 외에도 당뇨병 치료제인 글루코트롤(Glucotrol), 동물 약품인 애드보신(Advocin)과 아비엑스(Aviaz), 덱토맥스(Dentomax), 협심증 및 고혈압 치료제는 프로카디아 XL(Prodardia), 항진균성약인 디푸루칸(Diflucan) 등을 출시했다. 이런 여러가지 약품을 출시하면서 파이저는 세계에서 알아주는 제약업체가 되었으며, 1997년에는 포춘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제약회사'에 뽑히기도 했다.


하지만 파이저를 현재의 위치에 올려놓은 것은 다름 아닌 '비아그라(Viagra)' 였다. 비아그라는 발기부전 치료제로 전 세계 성기능장애 환자들의 희망이 되었다. 하지만 파이저는 처음부터 발기부전 치료제를 개발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파이저는 협심증 치료제를 개발 중이었는데, 협심증 치료를 위해 개발한 비아그라의 성분이 의외로 발기부전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파이저는 정력이라는 의미의 비거(vigor)와 나이아가라(Niagara) 폭포의 이름을 합쳐 '비아그라'라는 이름으로 발기부전 치료제를 출시했다. 하지만 이름처럼 비아그라가 정력제는 아니었다. 단지 발기를 강제적으로 도와주는 약품이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비아그라는 엄청난 판매량을 세웠고, 비아그라 덕분에 그동안 정력제로 알려져왔던 수컷 바다표범의 성기나 순록의 뿔의 판매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비아그라가 생태계를 유지하는데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 비아그라는 2000년에 전 세계 성기능장애 의약품 판매량의 90%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파이저는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여러 제약업체들을 인수하면서 회사의 규모를 키웠다. 워너 램버트(warner Lambert)나 파머시아(Pharmacia), 와이어스(Wyeth)등의 회사가 파이저와 합병되었다. 1999년에 파이저는 포브스지가 선정한 '올해의 기업'으로 파이저가 뽑히기도 했다. 파이저는 2004년에 세계적인 산업 지표인 다우존스 공업평균지수에 포함되면서, 최고의 제약업체로 인정받았다. 현재까지 파이저는 HIV 치료제나 금연 치료제, 다중표적항암제 등 다양한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또한 저소득층 미국인들을 위한 '더 파이저 포 리빙 쉐어 카드 프로그램(The Pfizer for living share card program)'을 선보이며, 저소득층 미국인들에게 매월 15달러 상당의 파이저 약품을 처방하는 등 여러 사회공헌도 행하고 있다.

아스피린만큼 전세계인이 많이 먹는 진통제가 있으니, 바로 타이레놀이다. 이 타이레놀을 제조하는 회사는 '존슨앤드존슨(Johnson & Johnson)'이다. 우리에게 존슨앤드존슨은 제약회사보다는 존슨즈베이비나 뉴트로지나 등 보습제를 만드는 회사로 더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존슨앤드존슨은 세계 1위의 제약회사로, 다우 존스 산업평균지수를 구성하는 30개 기업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존슨앤드존슨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존슨앤드존슨'이라는 사명은 창립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존슨앤드존슨은 로버트 우드 존슨(Robert Wood Johnson)과 그의 두 형인 제임스 우드 존슨(James Wood Johnson), 에드워드 미드 존슨(Edward Mead Johnson)이 함께 설립했다. 이들은 1886년에 외과용 붕대와 거즈를 생산하는 공장을 뉴저지주에 있는 뉴브런즈윅에 세웠다. 초대 사장은 로버트 우드 존슨이 맡았다. 존슨 가 형제들이 공장을 만들 당시에는 미국에 큰 병원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존슨앤드존슨의 외과용 붕대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10년 초대 사장인 로버트 우드 존슨이 사망하고, 뒤를 이어 제임스 우드 존슨이 1932년까지 대표직을 맡았다. 이후 로버트 우드 존슨의 아들인 로버트 우드 존슨 2세가 가업을 이어받았다. 제임스 우드 존슨 때부터 존슨앤드존슨은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1920년대에 소비재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이후 여러 제약회사를 인수해 제약 부문도 확대했다. 또한 1970~80년대에는 여성용품과 욕실용품도 생산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현재 존슨앤드존슨은 소비재(타이레놀, 모트린, 리치 칫솔, 벤드에이드 반창고, 클린 앤 클리어, 존슨즈 베이비 로션, 리스테린, 니조랄 등), 전문용품(아큐브 콘택트렌즈, 수술 기구, 관절 대용품 등), 의약품(암 치료제 에르가미솔, 경구피임약 오소노붐 등) 등의 분야에서 최고의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신기한 것은 우리가 쓰고있는 '반창고'라는 것을 처음 상용화한 곳이 바로 존슨앤드존슨이라는 것이다. 원래 반창고는 얼 딕슨이라는 사람이 개발했는데, 존슨앤드존슨이 로열티를 주고 상용화했다. 


그 외에 존슨앤드존슨의 대표품목인 타이레놀도 우리가 잘 아는 제품이다. 타이레놀은 아세트아미노펜(Acetaminophen)이 단일성분인 진통해열제로, 1950년대에 존슨앤드존슨에서 개발했다. 아세트아미노펜은 타이레놀 외에도 펜잘큐나 게보린, 판피린, 암씨롱 등의 주성분이기도 하다. 아세트아미노펜은 아스피린의 아세틸 살리실산에 비해 항염 효과는 적으나, 진통 및 해열 효과가 뛰어났기 때문에 열이 나거나 통증이 있을 때 널리 쓰이고 있다. 존슨앤드존슨은 타이레놀이 아스피린의 부작용을 제거한 진통제라고 광고해서, 미국 내 진통제 시장점유율을 35%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 타이레놀에 누군가가 독극물을 주입해 사람들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1982년, 사건이 일어났던 해에 타이레놀은 정제형과 캡슐형으로 시판되고 있었다. 이 중, 캡슐형 타이레놀에 누군가가 청산가리를 몰래 투입했고, 이 제품은 그대로 판매가 되었다. 소매단계에서 일어난 일이라, 존슨앤드존슨에게는 책임이 없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또한 해당 사건으로 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모두 시카고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미국정부는 시카고 지역에 배포되었던 타이레놀만 수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슨앤드존슨의 타이레놀 시장점유율은 7%까지 급락했다. 사상 최악의 위기상황을 맞게 된 존슨앤드존슨은 엄격한 조치를 취했다. 먼저 타이레놀의 생산과 광고를 모두 중단하고, 미국에서 시판되고 있는 모든 타이레놀을 수거했다. 또한 캡슐형으로 판매되었던 타이레놀 제품을 모두 정제형(알약)으로 교환해준다는 광고를 지속적으로 내보냈다. 당시 미국에 판매되고 있던 타이레놀은 약 3000만병이 넘었고 그 금액만도 1억 달러 정도였다. 존슨앤드존슨은 이에 그치지 않고, 언론의 취재에 적극 협조하면서 실시간으로 사건 관련 정보를 제공했다. 존슨앤드존슨은 언론을 통해 '만일의 사고를 대비해 타이레놀의 복용을 중지하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또한 타이레놀 관련 상담라인을 따로 구성해서, 소비자들의 질문에 발 빠르게 대응했다. 이러한 대응 덕분에 존슨앤드존슨이 수거한 타이레놀 중, 75개의 캡슐형 타이레놀에서 독극물이 검출되었다. 또한 8명의 사망자 이후 더 이상의 사상자는 없었다. 이후 범인이 체포되었음에도 존슨앤드존슨은 사건관련 위기관리위원회를 구성해서 사후처리문제 등을 수행했다. 언론과 대중들은 존슨앤드존슨의 이러한 대처를 매우 훌륭하고 책임감 있는 행동이라고 평가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존슨앤드존슨의 대처에 대해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준 존슨앤드존슨은 대중을 보호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평을 내렸다. 덕분에 존슨앤드존슨은 위기를 극복하고, 오히려 '신뢰가 가는 기업', '고객을 생각하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존슨앤드존슨은 처음 설립 당시, 14명의 직원과 존슨 형제 3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직원수만 무려 12만명이 넘는 대기업이 되었다. 본사는 아직까지 뉴저지 주의 뉴브런즈윅에 있으며, 현재 CEO는 앨릭스 고스키이다. 한국에서는 1983년에 한국존슨앤드존슨이 설립된 이후, 존슨앤드존슨컨슈머, 한국얀센, 존슨앤드존슨메디칼, 존슨앤드존슨비젼케어가 독립법인체로 운영되고 있다. 이 중, 한국얀센은 유한양행과 얀센 사가 합작형태로 설립한 회사이며, 얀센 사가 1961년에 존슨앤드존슨에 인수되면서 한국얀센도 존슨앤드존슨의 독립법인체가 되었다.

바이엘은 독일의 유명 제약 및 화학 회사이다. 흔히 아스피린을 만든 회사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바이엘 사에서 근무하던 펠릭스 호프만이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해열진통제인 아스피린을 개발했고, 덕분에 바이엘은 세계적인 제약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바이엘 사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바이엘이란 기업명은 설립자인 프리드리히 바이엘(Friedrich Bayer)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염료 세일즈맨이었던 프리드리히 바이엘은 1863년에 염료 장인인 요한 프리드리히 베스코트(Johann Friedrich Weskott)와 함께 염료기업을 세웠다. 염료기업의 이름 또한 프리드리히 바이엘(Friedrich Bayer & Co)였다. 두 설립자가 회사를 운영하는 동안에는 바이엘은 그저 화학염료를 생산하는 기업일 뿐이었다. 1880년에 프리드리히 바이엘이 사망하고, 1년 뒤에 요한 베스코트도 사망했다. 프리드리히 바이엘의 사위였던 카를 룸프가 회사를 이어받았는데, 그는 회사 이름을 '파르벤 파브리켄 포어말스 프리드리히 바이엘(Farbenfabriken vorm. Friedr. Bayer & Co)'로 바꾸고, 회사를 확장했다. 카를 룸프는 회사를 연합 주식회사로 변화시켰는데, 이 덕분에 바이엘 사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카를 룸프는 회사의 성장을 위해서는 젊은 화학자들이 육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이엘 사는 젊은 인재들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페나세틴'이라는 해열제를 개발한 카를 뒤스베르트(Carl Duisberg)였다. 페나세틴은 아세트페네티딘이나 p-아세트아미노페네톨이라고도 하는데, 발열성 질환이나 감기, 두통, 류머티즘, 생리통 등에 사용할 수 있는 진통제였다. 하지만 극약 성분이기 때문에 신독성 등을 야기할 수 있었다. 어쨌든 페나세틴은 당시 여러모로 사용이 가능한 진통제였기 때문에 많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파르벤 파브리켄 포어말스 프리드리히 바이엘 사는 의약품 사업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1897년에는 바이엘 사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펠릭스 호프만(Felix Hoffmann)이 아세틸살리실산을 개발했다. 원래 살리실산은 그 전 부터 해열과 진통에 효과적인 약제로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특유의 쓴 맛과 여러 부작용 때문에 많은 화학자들은 살리실산을 좀 더 쉽게 복용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펠릭스 호프만 박사는 살리실산은 아세틸화 시켜서 '아세틸살리실산'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아스피린(Aspirin)'이다. 파르벤 파브리켄 포어말스 프리드리히 바이엘은 아스피린 덕분에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바이엘 사는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1차 대전이 시작되고, 해외 수출에 의존도가 높았던 바이엘 사는 판매량이 급격하게 감소하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20년대에 들어서 바이엘 사는 타 기업과의 합병을 추진했다. 바스프(BASF), 훽스트(Heoechst) 등 6개의 기업이 합병하여 유럽 최대의 화학회사인 '이게 파르벤(I.G.Farbeni-industrie AG.)'을 설립했다. 이게 파르벤은 2차대전 당시, 나치를 후원하고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들을 학살하는데 사용된 가스를 제조했다. 나치 전쟁 범죄에 동참하면서 이게 파르벤은 엄청난 이득을 취했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끝나고, 연합군은 독일계 회사였던 이게 파르벤을 12개사로 분할 및 해체시켰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파르벤 파브리켄 바이엘(Farbenfabriken Bayer AG)'이었다. 바이엘 사는 독립된 이후 석유화학 산업 쪽에 집중했다. 이후 사업이 안정적으로 변하자, 바이엘 사는 석유화학 산업 외에도 심혈관 질환 관련 약품이나 피부 향균 등에 관한 제품을 개발했다. 1972년에 현재의 회사명인 바이엘(Bayer AG)로 이름을 변경했다. 또한 이 당시, 미국의 제약회사였던 Cutter Laboratories와 Miles Laboratories를 인수해서 미국 제약시장에서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중 Cutter Laboratories는 바이엘 사의 자회사인 커터 바이올로지컬(Cutter biological)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여기서 1980년대 중반에 개발한 약품이 바로 혈우병 환자들을 위한 혈액응고제인 팩터VIII 농축액이었다. 하지만 이 제품이 에이즈 바이러스 검사를 거치지 않고 사용되어 문제가 되면서, 결국 바이엘 사는 혈우병 환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해야 했다. 바이엘 사는 여러 난관 속에서도 성장해서 1990년대에 들어서는 아스피린 공장을 동독 비터필드에 설립했다. 또한 토론토의 Polysar Rubber Co.와 합병을 해서 세계 최대의 고무 원료 공급회사가 되었다. 2000년대에는 화학회사였던 Lyondell Chemical Co.를 인수해서 세계 최대 폴리우레탄 원료 생산업체가 되었다. 2012년에는 기업 지속가능성 부문에서 세계 3대 화학기업이자 독일 최고의 화학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바이엘 사는 현재 세계 150여 개국에 350여 개의 자회사를 두고 있다. 사업분야는 크게 건강, 농업, 고분자 재료 분야로 구성되며, 인체 의약품이나 동물 의약품, 식물 보호제, 가정용 살충제, 폴리우레탄, 폴리카보네이트, 도금 및 접착제 등을 생산하고 있다. 물론 가장 유명한 제품은 '아스피린'이다. 바이엘 사는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레버쿠젠을 연고로 하는 축구 클럽을 1904년에 창단하기도 했다. '바이엘 04 레버쿠젠'이란 이 축구클럽은 독일 분데스리가 1부에 소속된 프로축구클럽으로 오랜 역사를 지녔으나, 한번도 분데스리가에서 우승을 하지 못했다. 한국 선수로는 차범근이 1983년부터 89년까지 활약했으며, 그 외에 손흥민, 류승우 같은 선수가 이 클럽에 소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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