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하는 가방은 무엇일까? 한 설문조사에서 1위를 한 가방이 바로 에르메스의 버킨 백이라고 한다. 천만원을 호가하는 이 백이 여성들의 로망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심지어 엄청난 가격에도 불구하고 예약을 하지 않으면 구입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니, 에르메스에 대한 궁금증은 더해져만 간다. 지금부터 에르메스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면서 에르메스가 전 세계 여성들의 로망이 된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에르메스는 1837년 티에리 에르메스가 프랑스 파리에서 오픈한 작은 마구용품 가게로 시작하였다. 피혁공이었던 티에리 에르메스는 1800년대에 주요 교통수단으로 사용되던 마차에 필요한 여러 물품들을 직접 만들어 판매했는데, 그의 기술은 매우 뛰어났다. 그는 1867년 만국박람회에 자신이 만든 마구 제품을 출품해서 최고상을 수상했다. 덕분에 티에리 에르메스는 부유층 고객들을 자신의 고객들로 끌어모을 수 있었다. 티에리 에르메스에게는 샤를 에밀 에르메스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티에리 에르메스가 사망한 해인 1878년에 만국박람회에서 또 한 번 최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샤를 에밀 에르메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업을 물려받았고, 1880년에 매장을 프랑스 엘리제궁 근처로 이동했다. 엘리제궁 근처 포부르 생토노레 24번가는 부유층 고객들이 드나들기 쉬운 장소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에르메스 브랜드는 고급화 전략을 취하게 되었다. 에르메스에서 만드는 수작업 제품들은 하나같이 질이 좋았기 때문에 평판도 좋은 편이었다.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 외에도 일본의 군주들까지 에르메스의 제품을 사용했다. 에르메스는 시대가 바뀌면서 마차에서 철도로 교통수단이 변화하자, 마구용품 대신 여행용품이나 생활용품 쪽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샤를 에밀 에르메스의 두 아들인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와 아돌프 에르메스가 1902년에 사업에 참여했다. 이 중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가 사업을 이어받으면서, 에르메스 사는 본격적으로 패션 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에밀 모리스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 파견을 나갔는데, 그 때 유럽에는 전해지지 않았던 지퍼 장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에밀 모리스는 프랑스로 돌아와 '지퍼'에 대한 전매권을 획득해, 다양한 제품에 활용했다. 이 때, 처음 나온 제품이 바로 '볼리드' 였다.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첫 지퍼 잠금 가방이었다. 에밀 모리스는 미국에서 가방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돌아와, 가죽을 이용한 다양한 제품을 선보였다. 1922년 세계 최초로 가죽 핸드백을 만든 곳도 바로 에르메스였다. 이 외에도 실크스카프나 벨트, 장신구, 향수 등 다양한 패션제품을 생산해 인기를 끌었다. 에르메스는 마구상으로 시작한 브랜드이기 때문에, 마구를 만드는데 필요한 다양한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에밀 모리스는 이 기술들을 핸드백이나 여행가방을 만드는데도 활용해서 더욱 고급스럽고 튼튼한 제품을 생산했다. 1929년에는 에르메스의 첫 여성복 라인이 출시되었다. 1930년대 대공황이 일어나면서, 전 세계의 경제성장이 주춤했다. 이 시기에 에르메스는 단순하면서도 사용 용도가 분명한, 오랫동안 사용이 가능한 튼튼한 제품들을 선보였다. 현재 에르메스의 대표 상품이 된 캘리백, 브리프케이스, 기자용가방, 승마복 등은 전부 이 시기에 만들어진 제품이었다. 캘리백은 처음부터 캘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1935년에 첫 출시되었던 가죽 핸드백을 모나코의 왕비인 그레이스 캘리가 임신한 배를 가리기 위해 사용한 것이 잡지에 실리면서 '캘리백(Kelly bag)'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제품은 현재까지 에르메스의 대표 상품으로 활약하고 있다. 에밀 모리스는 1945년에 현재까지 에르메스의 로고로 사용되고 있는 사륜마차 로고(깔레쉬)를 상표로 등록했다. 


에밀 모리스의 사위인 로베르 뒤마가 사업을 물려받고, 에르메스의 성장세는 잠시 주춤한다. 현재 에르메스의 상징이기도 한 오렌지색 포장박스나 에르메스의 첫 향수인 '오드 에르메스' 등이 모두 이 시기에 나왔다. 하지만 다른 경쟁기업들이 워낙 빠른 성장세를 보이던 때라, 에르메스는 상대적으로 성장세가 둔화된 모습이었다. 이런 에르메스를 바꾼 것은 티에리 에르메스의 5대손인 장 루이 뒤마 에르메스였다. 그는 1978년에 대표자리에 오른 후, 시계부문 자회사인 라 몽트르 에르메스를 스위스에 설립하고, 에르메스의 실크, 가죽, 기성복 라인을 발전시켰다. 또한 팔찌, 자기, 크리스탈 등 제품을 확대하여 에르메스의 제 2의 전성기를 불러왔다. 장 루이 뒤마 회장은 이후 패션디자이너와의 교류를 통해 에르메스의 전통에 현대적 감각을 추가하고자 했다. 그는 베로니크 니샤니안이나 마틴 마르지엘라, 피에르 하디, 장 폴 고티에 등의 디자이너를 영입해서 남성복, 여성복, 주얼리 라인 등을 재정비했다. 이 중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tier)는 에르메스의 수석 디자이너로 8년간 활약하며 에르메스를 크게 성장시켰다. 장 루이 뒤마 회장은 2006년에 사임하고, 그 뒤를 이어 에르메스 사의 첫 번째 전문 경영인인 파트릭 도마(Patrick Thomas)가 CEO로 임명되었다. 2011년에는 새로운 수석디자이너로 크리스토프 르메르(Christophe Lemaire)가 선임되었다. 2014년 3월에 악셀 뒤마 에르메스가 새로운 CEO가 되면서, 에르메스 사는 다시 오너 체제로 변경되었다.


에르메스는 전통의 가죽제품 외에 맞춤복, 기성복, 악세서리, 향수, 문구류, 자기류, 은식기류 등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상품으로는 단연 '캘리백'과 '버킨백'이 있다. 버킨백은 장 루이 뒤마 회장이 영국 출신 모델인 제인 버킨과 비행기에 동석하면서 만들어졌다. 제인 버킨의 가방 안의 물건들이 엉망으로 뒤섞여있는 것을 본 장 루이 뒤마 에르메스는 수납이 가능한 포켓이 가방 안에 부착된 가방을 만들어 주었는데, 이것이 '버킨백'이 되었다. 버킨백은 일주일에 2개 정도만 만들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희소가치가 있는 제품이다.


에르메스는 광고에는 많은 돈을 투자하지 않는다. 제품의 질만으로 승부하자는 에르메스 가의 오랜 철학 덕분에, 에르메스는 광고 대신 전시회 등 문화행사에 더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다. 에르메스는 2008년에 순수문화를 지원하기 위한 에르메스 재단을 설립해서 운영하고 있다. 에르메스 재단은 3년에 한 번 씩 에밀 에르메스 상을 주최하고 있는데, 신진 디자이너들이 응용 미술과 디자인 부문 쪽에서 다양한 창조활동을 벌일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다. 처음 개최되었을 때는 유럽의 디자이너들에게만 해당되는 상이었지만, 2회부터 전 세계 디자이너들로 범위가 넓어졌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명품 중에 하나인 프라다는 이탈리아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패션기업이다. 프라다의 핸드백이 일종에 부의 상징이 되기도 했으나, 요즘은 젊은 대학생들도 생각보다 많이 들고 다닌다. 지금부터 프라다 브랜드의 역사와 프라다의 제품 등을 살펴보면서, 프라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프라다(PRADA)는 1913년 마리오 프라다와 마르티노 프라다 형제가 이탈리아 밀라노 갤러리아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아케이드에 오픈한 '프라텔리 프라다(이탈리아어로 '프라다 형제'라는 뜻)'라는 가게가 시초이다. 프라텔리 프라다는 가죽제품 전문매장이었는데, 가죽제품 외에도 영국에서 수입한 핸드백이나 트렁크가방도 같이 판매했다. 프라텔리 프라다의 제품은 이탈리아 사보이 왕실에서도 인정받아, 왕실 공식 납품 업체로 지정되기도 했다. 마리오 프라다는 패션디자이너였는데, 그는 여행을 좋아해서 유럽과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쌓았다. 그의 안목으로 선택된 제품들은 유럽 왕가와 상류층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프라다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유럽경제가 침체되면서, 프라다 또한 위기를 맞게 된다. 마리오 프라다는 여자는 사업을 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들이었던 알베르토 프라다에게 가업을 물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알베르토는 가업에 관심이 없었고, 결국 마리오 프라다가 1958년에 사망한 후, 그의 딸인 루이자 프라다가 가업을 잇게 되었다.


현재의 프라다가 있게 만든 것은 루이자 프라다의 딸이자, 마리오 프라다의 손녀인 미우치아 프라다였다. 그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위기를 맞은 프라다를 혁신적으로 바꿔놓았다. 1977년에 프라다의 회장직을 맡은 미우치아 프라다는 패션디자인을 전혀 배운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 덕분에 그녀는 독특한 방식으로 프라다의 디자인팀을 이끌었다. 먼저 그녀는 자신이 생각한 디자인을 디자인팀에 전달하고, 소재와 재단법을 디자인팀과 같이 상의하며 찾았다. 미우치아 프라다가 프라다 회장이 된 지 1년 뒤, 가죽 사업을 하던 파트리치오 베르텔리가 프라다와 동업을 시작했다. 원래 그 전 까지 프라다는 핸드백이나 트렁크 등의 가죽제품을 외국시장에서 완제품으로 수입해서 판매하고 있었다. 파트리치오 베르텔리는 미우치아에게 더 이상 수입에 의존하지 말고, 독자적인 스타일의 가죽제품을 개발하라고 조언을 했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이를 받아들여 새로운 가죽라인을 개발했고, 이것이 현재 프라다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파트리치오 베르텔리와 미우치아 프라다는 결혼을 해서, 파트리치오가 경영을 맡고 미우치아는 프라다의 디자인을 전담하는 2인체제로 운영하게 된다.


프라다의 새로운 시작은 바로 포코노 나일론을 이용한 가방이었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1979년에 방수천의 일종인 포코노 나일론을 이용해서 심플한 디자인의 가방을 만들었다. 원래 군용물품의 낙하산이나 텐트 등을 만들 때 사용되던 포코노 나일론을 가방에 접목시킨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특히나 그 당시 대부분의 가방들은 가죽소재를 이용해서 제작되었는데,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미우치아 프라다의 독특한 디자인 덕분에 새로운 제품이 탄생한 것이다. 검정색 포코노 나일론을 이용한 백팩과 토트백 세트가 1979년에 처음 출시되었다. 이 제품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실용적인 소재에 심플한 디자인으로 정장과 캐쥬얼에 두루 어울렸던 이 가방은 전 세계 유명 부티크와 백화점에서 없어서 못 파는 제품이 되었다. 덕분에 부도 위기였던 프라다는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다. 이후 프라다는 이 소재를 이용해 '프라다 클래식 핸드백'을 출시했다. 실용성과 디자인을 모두 충족한 이 제품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단번에 프라다를 명품 브랜드 반열에 올려놓았다. 프라다는 기존 밀라노에만 있던 매장을 이탈리아 피렌체, 프랑스 파리, 스페인 마드리드, 미국 뉴욕으로 확대했다. 또한 가방을 주로 판매하던 프라다에서 신발 라인을 새로 선보였다. 그 후, 1987년에는 여성용 기성복 컬렉션을 출시했는데, 길게 늘어뜨린 허리선과 가는 벨트, 우아한 스타일의 원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후 이러한 특징은 프라다 제품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프라다 브랜드의 성공에 이어, 미우치아 프라다는 1993년에 세컨브랜드인 '미우미우(Miu Miu)'를 출시했다. 이후에는 젊은 남성들을 위한 '프라다 워모(Prada Uomo)'를 출시했고, 뒤이어 언더웨어 브랜드인 '프라다 인티모(Prada Intimo)'와 스포츠 브랜드 "프라다 스포츠(Prada Sports)'를 연이어 출시했다. 특히 프라다 스포츠의 프라다 스니커즈는 큰 호평을 받았다. 프라다는 90년대에 들어서 특히 일본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전 세계 40여 개의 매장 가운데 20개가 일본에서 운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과 미국의 명품소비가 줄어들자 프라다는 타격을 받았다. 그래서 프라다를 운영하고 있던 파트리치오 베르텔리는 프라다의 지분의 약 25%를 펜디(Fendi)와 LVMH그룹에 매각했다. 다행히 2003년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소설로 출간되면서 큰 인기를 끌고, 2006년에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덕분에 '프라다'라는 브랜드 이름이 전세계 사람들에게 각인되는 효과를 누렸다. 2007년에 한국 LG전자와 협업해서 '프라다폰'을 출시하기도 했다. 프라다폰은 큰 인기를 얻어, 출시 다음 해에 '프라다폰2'가 출시되기도 했다.


우리가 알고있는 '사피아노 가죽'소재를 만든 사람이 바로 프라다의 창립자인 마리오 프라다이다. 그는 소가죽의 부드러운 부분을 빗살무늬나 철망무늬를 넣고 다시 광택을 냈다. 그가 만든 사피아노 가죽은 내구성이 뛰어나고 오염에 강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많이 쓰이는 가죽 소재이다. 이 소재를 활용한 프라다의 '사피아노 럭스백'은 프라다의 대표상품이다. 그 외에도 포코노 나일론을 이용한 백팩은 실용성과 디자인이 모두 어우러져 아직까지 큰 사랑을 받고있다. 그 외에 프라다의 대표 상품에는 '나파 고프레 백'이 있다. 나파 소재는 통가죽의 천연 결은 살리고 실크처럼 부드럽게 가공한 소재이다. 마리오 프라다는 이 소재를 가방이 이용했는데, 스페인 양가죽을 나파 가공법으로 실크처럼 만든 후 그 위에 광택을 입혔다. 이렇게 만든 소재로 주름장식을 만들어 만든 것이 바로 '고프레 백'이다. 나파 고프레 백을 마돈나가 들고 다니면서 '마돈나 백'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여러 할리우드 스타들이 나파 고프레 백을 애용했고, 덕분에 이 백은 스테디 셀러가 되었다.


프라다는 가방, 의류, 신발 외에도 지갑, 화장품, 향수, 보석, 시계 등 다양한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 약 80개국에 400개 이상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본사는 아직까지 이탈리아 밀라노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2인 경영체제로 운영되고 있으며, 미우치아 프라다가 디자인을, 남편인 파트리치오 베르텔리가 기업 경영을 맡고 있다. 2011년에는 홍콩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하기도 했다. 프라다는 2002년부터 글로벌 100대 브랜드에 꾸준히 선정되고 있다. 프라다의 로고에는 과거 이탈리아 사보이 왕실에 인정받았다는 증명으로 왕가의 문장과 매듭이 들어있다.




세계적인 명품브랜드를 꼽아보라고 하면, 루이비통은 빠지지 않을 것이다. 명품브랜드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루이비통은 수입 브랜드 시장에서 상위 1%를 차지하고 있다. 역사가 160년이 넘은 루이비통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루이비통이란 이름은 창립자인 루이 비통의 이름에서 따왔다. 루이 비통은 프랑스 파리에서 여행가방을 판매하는 상점을 열었다. 그가 가게를 오픈했던 1854년 당시, 여행가방은 윗면이 둥근 형태여서 마차에 차곡히 쌓기가 힘들었다. 여행가방이 아니면 나무 트렁크를 이용해야 했으나, 나무 트렁크는 여성들이 옮기기에는 무겁고 불편한 물건이었다. 이에 비통은 캔버스 재질로 만든 윗면과 아랫면이 모두 평평한 여행트렁크를 개발했다. 캔버스 재질은 튼튼했으며 무게도 나무에 비해 가벼워서 휴대하기가 편했다. 또한 평평한 디자인 덕분에 기차 또는 마차 짐칸에 여러 개를 쌓아 놓기도 용이했다. 덕분에 여행을 즐기는 상류층에게 루이 비통의 여행가방은 큰 인기를 모았다. 이후 교통수단의 발달로 인해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루이 비통의 사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루이비통은 다양한 종류의 여행용 가방을 출시했고, 품질이 다른 브랜드보다 월등히 뛰어난 덕분에 명품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다. 루이비통의 가방은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는 동메달을, 1889년에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서는 동메달과 금메달을 획득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명품은 그에 대한 모조품이 만들어졌다. 루이 비통은 자신의 제품의 모조품이 판매되자, 모조품과 진품을 구별시키기 위해 1876년에 베이지와 갈색 줄무늬 색으로 디자인을 변경했고, 이 디자인은 지금까지 루이비통 브랜드의 상징이 되었다. 1892년에 루이 비통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이었던 조르주 비통이 사업을 이어받았다.


조르주 비통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모조품을 막기 위해 1896년에 모노그램 캔버스를 개발했다. '모노그램 캔버스'는 루이의 L과 비통의 V을 중심으로 꽃과 별 모양을 첨가한 마크였다. 루이비통은 이 마크를 세계적인 특허로 등록하는 동시에, 제품에 활용했다. 모노그램 캔버스가 전체적으로 프린팅된 '루이비통 모노그램 트렁크'는 루이비통의 주요 제품이 되었다. 루이비통 모노그램 트렁크는 최초로 회사 마크를 사용해 제품을 만든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루이비통은 아직까지 세계 명품 브랜드 중 모조품이 가장 많은 브랜드 중 하나이다.) 루이비통은 모노그램 캔버스 디자인을 아직까지 제품 전면에 사용하고 있지만, 제품 소재나 디자인을 변경하면서 다양한 제품을 출시했다. 시대의 흐름에 맞는 디자인과 루이비통의 역사를 상징하는 모노그램 캔버스의 조화는 루이비통의 희소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루이비통은 끊임없는 제품개발을 통해 명품브랜드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으나, 전세계로 사업을 확장하기에는 무리였다. 가족경영체제 속에서 사업확장을 고려하던 조르주 비통은 주류 제조업체인 '모에 헤네시'와 합병하여 LVMH(루이비통 모에 헤네시)그룹을 설립한다. LVMH는 설립 이후 세린느, 지방시, 겐조, 겔랑, 로에베, 헨디, 태그 호이어, 메이크업 포에버, 도나카렌, 크리스찬 디올 등 다양한 브랜드를 인수하면서 세계 최대의 명품 업체로 성장했다.


1936년 조르주 비통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가스통 루이 비통이 루이비통을 이끌게 되었다. 루이비통은 1978년부터 일본, 태국, 대만, 한국 등 아시아 시장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변화하는 트렌드에 맞춰, 루이비통은 1997년에 아트디렉터로 마크 제이콥스를 영입했다. 마크 제이콥스는 뉴욕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로 젊은 감각을 루이비통 브랜드에 가미시켰다. 전통은 두고 세련된 느낌만 가미한 그의 디자인은 루이비통의 영역을 더욱 확장시켜주었다. 마크 제이콥스가 영입되면서 루이비통의 영역은 의류, 신발, 주얼리 등으로 다양화되었다. 2003년에는 네오 팝 아티스트인 무라카미 다카시와 협업하여 기존의 모노그램을 97가지의 색으로 표현한 '모노그램 멀티컬러'를 론칭했다. 모노그램 멀티컬러는 루이비통을 원하는 젊은 층을 사로잡을 수 있는 화려하면서 세련된 디자인으로 주목받았다. 변화와 전통을 잘 조화시킨 덕분에 루이비통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한 번 쯤은 소장하고 싶은 대표적인 명품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현재 루이비통은 미국, 영국, 한국, 대만, 브라질, 러시아 등 세계 140여 개국에 진출해 있다. 루이비통은 제품 출하 전에 낙하 실험이나 5000번 정도의 지퍼 여닫기 등의 엄격한 테스트를 거쳐 통과된 제품만을 판매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하위 브랜드를 따로 만들지 않고, 오로지 루이비통이라는 브랜드만 고집해 브랜드 라인을 차별화하고 있다. 아울렛이나 할인점 등에서 제품을 판매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며, 주요 거점 백화점이나 플래그십 스토어 등에서만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게다가 한정판 제품을 만들어 제품 판매 기간을 최소화하기 때문에 루이비통의 고급 이미지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루이비통은 프랑스에 있는 아니에르 공방에서 특별 주문 생산 서비스인 몽 모노그램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자신만의 루이비통 제품을 가질 수 있다는 루이비통의 고급 전략은 큰 인기를 모았다. 한국에서는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가 루이비통이 요청해서 디자인 과정에 직접 참여해 만든 스케이트 케이스 트렁크를 사용하고 있다.

이탈리아에는 여러 명품 브랜드들이 있다. 그 중 펜디는 이탈리아 최고의 명품 모피 브랜드이다. 지금은 명품가방 브랜드로도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모피브랜드의 대명사 펜디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펜디는 1918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시작되었다. 아델레 카사그란데는 로마 중심가에 자그마한 모피 전문 가게를 차렸다. 그 후 그녀가 1925년에 에두아르도 펜디와 결혼하면서, 가게의 이름을 '펜디(Fendi)'로 변경했다. 소규모 가게였던 펜디는 1962년부터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원래 모피 및 가죽 전문 가게에서, 신발, 지갑, 기성복까지 제품을 확대한 것이다. 또한 오뜨 꾸띄르와 기성복 제조 업체에 제품을 공급하기 위한 컬렉션도 개최한다. 펜디는 파산 직전의 영화관을 인수해서 매장으로 개조했는데, 이것이 바로 펜디 플래그 스토어였다. 펜디는 에두아르도 펜디와 아델레 카사그란데의 다섯 딸들이 운영했는데, 사업 확장 이후 1965년부터 세계적인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와 인연을 맺었다. 


잠시 칼 라거펠트에 대해 설명하자면, 그는 독일 출신 디자이너이다. 어려서부터 예술과 옷에 관심이 많았던 라거펠트는 1952년 프랑스로 이주한 후, 1954년에 국제양모사무국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면서 패션계에 입문하게 된다. 그는 1955년 피에르 발망 하우스에서 견습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 후, 5년 간 장 파투로 자리를 옮겨 꾸띄르 컬렉션을 진행했지만, 파리 꾸띄르에 염증을 느끼게 된다. 결국 라거펠트는 1963년에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독립했다. 그는 그 후, 마리오 발렌티노, 크리지아, 찰스 주르당 등 다양한 브랜드를 위한 디자인을 제공했다. 그는 기성복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영역을 넓혔다. 특히 1965년부터 펜디와 협업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펜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펜디는 모피만으로는 새로운 시대에 대응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업을 확장했고, 라거펠트는 펜디의 상징이 된 로고 제작과 다양한 디자인을 제시했다. 라거펠트의 디자인은 펜디를 젊고 현대적인 브랜드로 변모하도록 도와줬고, 펜디는 모피와 가죽의 트렌드를 이끄는 명품 브랜드가 되었다.


펜디 가의 다섯 딸들은 라거펠트와 계속 인연을 이어갔고, 덕분에 기존의 획일적이던 모피 디자인은 다양화되었다. 라거펠트와의 첫 컬렉션은 패션 관계자들의 큰 관심을 얻었다. 펜디는 라거펠트의 젊고 현대적인 디자인과, 기존 펜디의 고전적인 명품 느낌을 함께 접목시켜 세련된 명품의 이미지를 이어갔다. 또한 펜디는 바게트 백이라는 새로운 디자인의 가방을 선보였다. 바게트처럼 옆으로 길쭉해서 옆구리에 끼고 다닐 수 있는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이 백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펜디가 모피 외에 다른 제품들에서도 인정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바게트 백은 지금까지 400여 개가 넘는 디자인을 선보이며 아직까지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특히 미국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소품으로 등장해 큰 인기를 누렸다.


현재 펜디는 바게트, 레이 백, 피카부, 미니 피카부, 투쥬르, 바이 더 웨이, 닷컴, 닷컴 클릭, 스몰 칸 아이, 칸 아이, 백팩, 트와쥬르 등의 가방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가방 외에도 여성 슈즈, 남성 슈즈, 지갑, 패션 쥬얼리, 선글라스, 스카프, 벨트, 시계, 여성복, 남성복 등 다양한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펜디는 2001년에 모엣 헤네시와 루이비통이 합병해 만들어진 LVMH의 산하로 들어갔다. LVMH는 다국적 럭셔리 그룹으로 디올, 루이비통, 펜디, 지방시 등이 이에 속해있다. LVMH의 본사는 현재 프랑스 파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회사가 된 펜디의 본사는 아직까지 이탈리아 로마에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수지가 광고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