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아시아 중에서 가장 빨리 선진국 라인에 속한 나라이다. 일본은 다양한 글로벌 브랜드가 있는데, 그 중 가장 먼저 세계에 알려진 기업이 바로 소니(SONY)이다. 전자제품뿐만 아니라 콘텐츠도 생산 및 판매하는 기업으로, 영화, 음반 등의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도 강세를 보이고 있다. 아시아 글로벌 브랜드 소니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일본은 패망했다. 그런 일본을 일으켜세운 기업 중 하나가 소니라고 해도 크게 과언은 아닐 것이다. 소니는 1946년에 엔지니어인 이부카 마사루와 경영인이었던 모리타 아키오가 동업해서 설립했다. 이부카 마사루는 원래 도쿄에서 라디오수리점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동료였던 모리타 아키오가 합류하면서 Tokyo Tsushin Kogyo K.K(도쿄통신공업)라는 회사를 만든다. 이 회사가 현재의 소니인 것이다. 이부카와 모리타는 미국기업이 1950년대에 주목했던 트랜지스터 기술을 일반 통신업에 접목시킨 제품을 발명했다. 바로 1955년에 개발된 일본 최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인 소니 TR-55였다. 같은 해에 TR-72모델도 출시되었는데, 이 모델은 일본, 네덜란드, 독일, 캐나다, 호주 등지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큰 인기를 모았다. 또한 1957년에는 초소형 라이도인 TR-63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의 10대 청소년들 사이에서 초소형 라디오가 유행하면서,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다. 도쿄통신공업은 1958년 회사 이름을 소니로 변경하고, 1960년에 '소니 코퍼레이션 오브 아메리카'라는 이름의 미국 지사를 설립했다. 소니라는 이름은 sound의 어원인 라틴어 sonus와 sonic의 어원인 sonny의 합성어로, 자유롭고 개척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사용했다. 1960년에 소니는 세계 최초로 포터블 TV를 개발했다. 소니는 미국을 시작으로 스위스, 홍콩, 영국 등에 지사 및 계열사를 설립하면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1960년대 말부터 소니는 텔레비전, 컴퓨터 모니터, 워크맨, CD, CD 플레이어, 노트북, 플레이스테이션 게임기 등을 개발하며 전자제품 시장을 선도했다. 특히 1979년에 출시된 워크맨과 1994년 처음 선보인 플레이스테이션은 전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특히 플레이스테이션은 전세계에서 1억대 이상 팔린 최초의 콘솔게임기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전자제품으로 큰 성공을 거둔 소니는 1968년에 CBS와 합작해서 CBS-SONY 레코드 사를 설립했다. 또한 1979년에는 푸르덴셜 파이넨셜과 함께 소니 푸르덴셜 보험사를 설립했다. 이렇게 소니는 전자제품 뿐만 아니라 음반이나 보험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다각화하였다. 그 후에도 소니는 1989년에 콜롬비아 영화사를 인수하고 2005년에는 MGM까지 인수하면서 영화사업 쪽으로도 진출했다. 덕분에 소니는 글로벌 미디어 기업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현재 소니의 자회사는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 소니 픽처스 엔터테인먼트, 소니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스, 소니 파이넨셜 등이 있다. 소니는 2014년에 포춘이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 순위에서 105위를 기록하였고, 2014년 기준으로 매출액이 8조 2,158억 엔에 달하였다. 또한 685억 엔의 영업 이익을 기록하면서 대기업의 면모를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세계적인 종합금융회사인 푸르덴셜 파이넨셜은 미국 뉴저지에 본사를 두고, 현재 미국을 포함한 30개국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연금이나 보험 등 다양한 금융상품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지난 AIA 포스팅에 이어, 금융회사에 대한 포스팅을 이어가도록 하겠다.



푸르덴셜 파이넨셜은 1875년 설립되었다. 당시 미국은 경제공황과 다른 나라의 이민자들의 대거 유입으로 경제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당시 미국에서는 '생명보험'의 중요성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생명보험에 가입하려 했다. 하지만 경제상황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서민들이 값비싼 생명보험에 가입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에 존.F.드라이든은 '일주일에 3센트'라는 슬로건을 걸고 뉴저지에 'Widows and Orphans, Friendly Society'이란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처음 Widows and Orphans, Friendly Society은 노동자 중심의 저렴한 보험상품만을 판매했다. 인기를 얻기 시작하자 Widows and Orphans, Friendly Society는 사업영역을 확대해나가기 시작했다. 뉴저지에서 미국 전역으로, 그리고 푸에르트리코와 멕시코까지 진출했다. 그 후 상호회사로 변경한 Widows and Orphans, Friendly Society는 1975년, 회사명을 'Prudential Friendly Society'로 변경했다. 잠시 존.F.드라이든에 대해 설명하자면, 그는 Widows and Orphans, Friendly Society를 설립한 후, 1902년 미국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존.F.드라이든이 1911년 사망한 후, Widows and Orphans, Friendly Society는 그의 아들인 포레스트 드라이든이 이어 운영했다. Prudential Friendly Society은 1977년 회사명을 Prudential Insurance Company of America로 바꾸었다가, 그 해 다시 이름을 Prudential Financial로 변경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이 이름으로 회사가 운영되고 있다. 

푸르덴셜 파이넨셜과 관련된 사기사건이 있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푸르덴셜 파이넨셜은 사기 혐의로 증권 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았다. 푸르덴셜 파이넨셜의 부서였던 PSI에서 사기로 투자자들을 끌어들인 사건이었는데, 사건 금액이 80억 달러에 육박했다. 이는 미국 역사 상, 가장 큰 규모의 사기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약 40만 명에 달하는 개인투자자들이 피해를 입었다. 1993년에 들어서야 푸르덴셜 파이넨셜은 피해자들과의 합의를 마칠 수 있었다. 합의금액은 3억 3천만 달러였다. 이러한 커다란 사건을 겪고도 푸르덴셜 파이넨셜은 계속 성장했다. 그 바탕에는 푸르덴셜 파이넨셜의 다양한 상품개발이 있었다. 

푸르덴셜 파이넨셜은 1916년 처음으로 단체보험을 출시했다. 이후 1952년에는 개인건강보험을 출시했다. 미국은 한국처럼 국가에서 제공하는 건강보험이 따로 있지 않고, 보통은 직장에서 건강보험에 가입시켜준다. 미국은 의료비가 비싸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건강보험에 가입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실직한 상태이거나 보험이 제공되지 않는 직장에 다니는 경우,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푸르덴셜 파이넨셜은 개인을 위한 개인건강보험을 출시했고 꽤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사실은 이마저도 부유층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푸르덴셜은 1979년 일본기업인 소니와 함께 소니-푸르덴셜 생명보험 회사를 설립해 일본에 진출했다. 푸르덴셜 파이넨셜은 1999년 계열사였던 프루덴셜 헬스케어를 매각했다. 대신 미국 최대의 연금보험사업자였던 아메리칸 스칸디아를 인수해 영업범위를 확장시켰다. 푸르덴셜 파이넨셜은 이후에도 시그나보험사의 퇴직연금보험 사업부문을 인수했다. 이후 2011년에는 AIG에디슨과 AIG스타 등을 인수해서 아시아에서의 프루덴셜 파이넨셜의 사업을 확장했다. 2013년에는 하트포트의 개인생명보험 사업을 인수해서 생명보험 서비스를 강화했다. 

그 덕분에 현재 푸르덴셜 파이낸셜의 주요 상품은 생명보험, 연금보험, 자산경영, 증권, 부동산상품, 은퇴자 투자관련 상품(퇴직연금 등), 뮤추얼펀드 등의 종합금융서비스이다. 푸르덴셜 파이낸셜은 여러 악재속에서도 굳건히 성장하여 관리자산이 현재 8,710억 달러에 육박한다. 또한 프루덴셜은 2003년부터 매년 기업평등지수 100%등급을 받고있다. 프루덴셜 파이넨셜은 사회초년생이 경력을 쌓기 좋은 회사로 119개의 주요기업 중 59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AIA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최대 다국적 보험회사이다. 상하이에서 설립된 후, 아시아태평양 전역으로 퍼져 현재 총 13개의 국가에 진출해있다. 이러한 AIA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AIA의 모태는 1919년 코넬리우스.V.스타가 중국 상하이에 설립한 AAU이다. 코넬리우스는 이후 1931년, 상하이에 INTASCO를 설립했는데, 이것이 AIA의 모태라는 설도 있다. 현재 AIA는 AIG의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자회사로 분류되어 있다. 생명보험, 건강보험, 은퇴설계, 자산관리 등 다양한 분야를 담당하고 있다. 현재 AIA는 중국, 홍콩, 마카오,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호주, 싱가포르, 타이완, 인도, 뉴질랜드, 베트남, 브루나이 등에 진출해 약 2,300만 명의 고객을 확보하고 있다. 
현재의 CEO는 영국 잉글랜드 출신의 마크 터커이다. 그는 2010년부터 AIA의 경영을 총괄하고 있다. 그는 원래 축구선수였다. 영국의 프로축구팀인 울버햄튼 원더러스, 로크데일, 바넷 등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그는 축구선수로 활약하면서도 회계와 세무를 공부했다. 회계사로 전향한 터커는 1986년 푸르덴셜에 입사했다. 그 후 마크 터커는 승승장구했고, 1994년에는 푸르덴셜 아시아 자회사의 책임자가 되었다. 10년간 아시아 자회사를 잘 이끈 그에게 푸르덴셜은 그룹 총괄 CEO자리를 맡겼다. 그가 푸르덴셜의 총괄책임자가 된 이후 푸르덴셜 매출에서 아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이 9%에서 25%까지 증가했다. 그만큼 그는 아시아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였다. 그런 그가 2009년에 푸르덴셜의 총괄책임자에서 물러났다. 
한편, AIA는 그 당시 위기에 봉착해있었다. 모기업인 AIG가 파산위기에 직면해있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 말부터 세계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고 있었고, AIG또한 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 AIA는 이러한 AIG의 빚을 갚기 위해 매물로 나왔다. 이런 AIA를 인수하려 한 업체 중 한 곳이 바로 푸르덴셜이었다. 하지만 푸르덴셜의 주주들은 AIA의 인수금액이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AIA인수를 반대했고, 결국 AIA의 매각은 실패로 돌아갔다. AIA은 매각이 실패한 후, 더욱 수세에 몰렸다. 남은 방법이 홍콩 증시에 상장하는 것 뿐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원활하지 않았다. 그런 AIA가 선택한 마지막 방법은 의외였다. 바로 전 푸르덴셜의 CEO인 마크 터커를 총책임자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터커는 총책임자로 임명된 후, AIA의 조직체계를 완전히 바꿨다. 복잡한 보고체계를 단순화시키고 자신에게 보고하는 인원을 20여명에서 절반 가까이로 줄였다. 대신 자신이 직접 직원들을 찾아가는 횟수를 늘렸다. 여러 위기 속에 AIA의 사내분위기는 어수선할 것이라는 추측이 많았다. 하지만 터커가 취임한 이후, 그러한 사내분위기는 금방 가라앉았다. AIA는 1919년에 시작된 역사깊은 회사였기에 충성도 높은 직원들도 많았다. 경쟁사의 전 책임자가 새로운 CEO로 온다는 소식에 반발하는 직원도 있을 법 했지만, 오히려 푸르덴셜 아시아 자회사에서 10년간 일한 경력 덕분에 AIA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던 터커를 모두들 반겨주었다. 덕분에 마크 터커는 수월하게 AIA에 대해 파악하고 체계를 변화시킬 수 있었다. 터커의 취임 이후, AIA는 2010년 10월에 홍콩증시에 상장되었다. AIA는 홍콩 증시 사상 최대 규모인 178억달러를 모았다. 당시 주식을 사겠다는 사람들이 너무 몰리는 바람에, 3일로 예정되어있던 공모를 하루만에 끝내기도 했다. AIA는 원래 AIG가 10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홍콩증시에 상장되면서 AIG의 지분율은 33%까지 낮아졌다. AIA의 시가 총액은 2011년 기준으로 409억달러이며, 이 금액은 모기업인 AIG의 시가 총액의 70%에 육박하는 것이었다. 상장에서 큰 성과를 거둔 터커는 그 후 AIA의 조직과 재무 관리에 집중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AIA는 신규보험 가입자 수가 크게 늘었고, 터커가 취임했던 2010년의 영업이익은 전년도보다 18%가 증가했다. 이것은 AIA의 홍콩진출 80년 역사상 최대 매출이었다. 그 후에도 이 기록은 계속 경신되었다. 
현재 한국 지사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에 위치해있다. 한국에는 서울특별시에만 37개의 지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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